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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4년 7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기획 특집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현실 인식과 대응’ 주살(誅殺) 계획으로 시선을 바꾸었다. 모금을 통해 권총을 구입하고 계획을 실행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이 거사는 당시 생각하는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감명 과 더불어 나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데 결정적인 계 기가 되었다. 정교(鄭喬)가 나철에 대해, “세계의 대 세를 두루 살펴보면서 나라에 대해 근심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중략)…의로운 선비 150명 을 모아 박제순 등을 죽이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 했다. 나라 사람들도 통쾌해하며 슬퍼하지 않는 사 람이 없었다.”고 평가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나철 은 이 사건으로 인해 내란죄의 죄목을 쓰고 유형(流 刑) 10년의 선고를 받지만, 고종(광무황제)의 배려로 유형살이 몇 개월 만에 사면되었다. 현실 인식 -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있다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나철 은 일제의 침략이 코앞에 닥쳤음을 직감했다. 그는 후일 대종교 중광(重光, 단군신앙을 다시 일으킴)에 함께 참여한 정훈모(鄭薰模) 등과 1908년 11월 네번 째 도일(渡日)을 시도하여 국운을 돌려보려는 노력을 하지만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나철 은 이 네번째 도일에서 현실 각성의 계기가 되는 운명 적인 만남을 경험한다. 도쿄(東京)에서 백봉신사(白 峯神師)의 제자인 미도(彌島) 두일백(杜一白)이란 인 물을 만난 것이다. 당시 두일백은 대종교 중광의 정 신을 담은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비롯한 여러 문적을 전하면서 “국운은 이미 다하였는데, 어 찌 이 바쁜 시기에 쓸데없는 일로 다니시오. 곧 귀국 하여 단군대황조의 교화(敎化)를 펴시오.”라는 충고 를 거듭했다 한다. 나철은 바로 귀국 길에 올랐다. 그리고 마음에 새 긴 것이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 은 있다)’이다. 그는 ‘국망’으로 치닫는 격변기에 우 국의 행보를 옮기면서도, 늘 시대적 사슬로부터 벗 어나고자 했던 ‘정신’을 갈망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의 부활을 대종교의 중광에서 찾고자 했 다. 그는 국망(일제의 강점)이라는 절망감 속에서 도 존(道存, 단군사상)으로써 미래의 희망을 찾고, 그 구 체적 방법으로 단군신앙의 중광을 모색하게 된다. 나철이 창교(創敎)가 아닌 중광을 선택한 것도 이러 나인영(나철, 오른쪽 끝) 등에 대한 대한제국 평리원의 판결문 (1907.7.3, 국가기록원 제공) 젊은 시절의 나인영(나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