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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3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8주년 특집 일제 말기 상황과 국내외 한국인의 대응  에 항일무장세력을 조직하여 계획적으로 동북항일 유격활동을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즉 동북인민항일 연군은 중국의 통일적 임시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만주에서 조직된 과도정권의 ‘항일군대’였다. 각 지역 유격대의 연합으로 출발한 동북항일연군 (東北抗日聯軍)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한다는 만주성위의 정책 기조 하에서 편제를 개편하였다. 1936년 11월 동북항일연군은 제1군부터 제7군까지 개편되었으며, 총 11군 3로군으로 편제되었다. 제1 로군은 제1군과 2군, 제2로군은 4, 5, 7, 8, 10군, 제3 로군은 제3, 6, 9, 11군으로 구성되었다. 동북항일연 군은 1940년에 들어서면서 만주국의 강력한 탄압으 로 인해 그 활동이 상당히 위축됨으로써 1942년 동 북항일연군 교도려(敎導旅)로 통합되었다. 동북항일 연군의 인적자원의 상당수는 한인이었지만, 실질적 인 권한은 중국인에게 집중되었다. 또한 한인 들의 이중적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하기도 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만주국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전 투 및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열차습격이나 헌병대를 공격함으로써 일제 침략의 상징물에 대한 파괴를 그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 북항일연군은 군수비용을 전투를 통해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1930년대 말 일제가 군사적 경제적 봉쇄를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정문제 가 가장 곤란하였는데 동북항일연군에서는 이를 직 접 해결하기 위해 전투를 치렀다. 뿐만 아니라 동북 항일연군은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평안북도 일대에 서 크고 작은 전투를 전개하였다. 예컨대 이홍광은 1935년 2월 일제의 만주침략에서 군사적 요충지의 하나였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기습하여 커다 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제2 군 제4사와 제6사가 함경북도 무산과 갑산으로 진출 하여 국내 진공에 박차를 가하였다. 유격대를 모태로 성장했던 동북항일연군은 지역 민에 대한 동조세력 확보가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데 필수요소였다. 따라서 이들은 노래책, 삐라 등을 통 하여 대 군중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동북항 일연군의 활동은 일반인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부 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북항일연군은 “민중에 대 한 조직공작과 선전공작을 잘해야 한다”는 전제 하 에 대중들과 괴리되는 현상을 미연에 방지하는 노력 을 전개하였다. 떠난 자와 남은 자들, 기억하는 이들 한인들은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집단부락 설 일본군 조선주차 헌병대사령부에서 파악한 「국 외거주조선인의 상황」 비밀자료(1913, 독립기념 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