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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3년 7월 Special Theme  6 · 25전쟁 정전70주년 특집 독립군 · 광복군에서 국군으로 활약한 인물들 하였다. 당시 그와 같은 기수에 입학한 한인은 총 14 명이었다. 이들이 운남 강무당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기간은 총 2년이었다(배숙희, 앞의 논문, 242쪽). 이 를 토대로 살펴보면 이준식은 1919년 중국으로 망명 하여 군관학교를 졸업한 1928년까지 독립운동을 위 해 군사교육 등을 받으며 보냈다고 할 수 있다(다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다각적 검토가 필요하다 - 편집자 주). 이후 그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중국군에서 복무하기도 했고,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 격화된 이후에는 무장 투쟁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해방 후 귀국과 국군 투신 이미 불혹(不惑)을 넘기고, 곧 지천명(知天命)을 앞 두고 있는 상황에서 생애 대부분을 중국에서 활동 한 그가 남한을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 사회주의와 의 분명한 결별을 의미하였다. 특히 해방 직후 남한 에서 그가 걸었던 첫번째 행보는 조선민족청년단에 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조선민족청년단을 실질 적으로 운영하고 지휘하는 사람은 이범석(李範奭)의 한국광복군 계열 및 미군정과 관련된 사람들이었 다. 한국광복군에서 이범석과 함께 독립전쟁을 전개하 였던 화강 이준식은 남한으로 귀국한 이후 조선민 족청년단 중앙단부의 부단장으로 임명되어 함께 활 동하였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국군 고급장교 확 충 계획에 따라 군사경력자를 기용하기로 결정하면 서 조선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던 이준식 역시 다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동아일보》 1948년 12월 25일, ‘軍事經歷者 國防部서 起用’). 이때 그의 경력은 중국군 출신으로 민족청년단 대리단장으로 소개되 었다. 화강 이준식과 함께 군사 경력자로 기용된 이들은 모두 11명이었다. 일본군 출신으로 김석원(일본군 대좌, 육해공군 출신 동지회 회장), 백홍석(일본군 중 좌), 안병범(일본군 중좌), 류승렬(일본군 대좌) 등이 있었다. 독립군 출신은 안춘생(중국군 출신, 민족청 년단 훈련부장), 전성호(중국군 출신), 오광선(신흥군 관학교 출신) 등이었다. 1948년 12월 대한민국 국방부는 육군본부정보처 중국 곤명(昆明)에 있는 운남강무당 건물(국가보훈부 제공) 조선혁명군 재직시 이준식과 대립했던 양세봉 사령 관  흉상(중국 요녕성 신빈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