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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3년 4월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파리강화대표회의의 대표로 파견하였다. 전로한족 중앙총회는 한인사회의 자치를 신장시키는 한편, 제 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조선독립방략을 집중 논의 하면서 ‘전 민족적인 임시적 중앙기관’의 위상을 표 방한 대한국민의회로 확대·발전되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의장 문창범, 부의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 선전(宣戰)부장 이동휘, 외교부장 최재형, 재 무부장에는 한명세를 선임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재러 한인 대표기구로서 뿐만 아니라 서북간도와 일 부 국내에까지 영향을 주었던 독립운동의 중추기관 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시기 일부 한인 민족운동가들은 사회주의 이 념을 수용하였다. 1918년 5월 이동휘, 깁립, 유동열, 이인섭, 이한영, 김알렉산드라, 박애 등이 한국 최초 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이들 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옹호와 협조가 조선독립 달 성의 길이라 생각하였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 크 신한촌에서 대표자회의를 열어 박진순, 박애, 이 한영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 받는데 성공하였다. 국내 3 · 1운동 호응, 이후 ‘4월 참변’으로 독립운동 큰 타격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 신 한촌의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11개국 영사관 과 6개 러시아 관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독 립만세운동을 벌였다. 46세 이상 74세까지의 남녀 노인으로 구성된 노인단(老人團)은 1919년 3 · 1운동 이후 동지규합과 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신한촌에서 조직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대한국민 노인단 대표 김치보 외 20명’ 명의의 한국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다. 단원들을 국내로 파견하 여 서울 보신각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 며, 의혈 투쟁을 전개하였다. 65세의 강우규는 9월 남대문 역에서 새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 탄을 던졌다. 조선총독 처단은 실패하였지만, 일제 수뇌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강우규는 1920 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➊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➋ 우수리스크에 있는 전로한족중앙총회 건물 ➋ 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