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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름 독립운동 유공자 학교 문대식, 김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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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식(文大植)은 충남 금산(錦山) 사람이다. 고향에서 문방구 점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1940년 4월 창고를 청소하던 중 일본 대판(大阪)의 〈매일신문(每日新聞)〉에서 1909년에 발행한 세계지도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검토한 결과 한국이 본래 독립국임과 국기(國旗)가 있는 것을 확인한 후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년 5월 11일 금산읍의 각종업소에 근무하는 18세 내외의 청년동지 7명과 더불어 친목을 위장한 항일결사 시장친우계(市場親友 )를 조직하였다. 동계는 동년 7월 진락동지회(進樂同志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항일투쟁을 펴나갔다. 동회는 항일투쟁의 방법으로 우선 일제의 조선인 지원병 강제모집에 반대하여 불합격자초운동(不合格自招運動)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매월 15일에 모임을 갖고 이의 추진상황을 검토해 가기로 하였다. 또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과 접선하여 항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할 목적으로 동지인 최병무(崔秉茂)를 중국에 파견하였다. 이에 필요한 여비 200여원은 동 회원들이 40원씩 분담하여 마련하였다. 한편 그는 1940년 9월 17일 정해안(鄭海晏)·박승묵(朴勝默) 등과 더불어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금산군 남이면(南二面)에 소재한 관광명소인 진락산동굴(進樂山洞窟)의 암석에 페인트로 대형태극기를, 그리고 조선독립만세라고 조각된 목탑(木塔)을 건립하였다. 이일로 인하여 그는 1941년 2월 17일 일경에 붙잡혀 1942년 5월 13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부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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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중(金龍中)은 충남 금산(錦山) 사람이다. 일찍이 미국으로 이민한 그는 학문 연마를 통해 실력을 양성한 후 이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라는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권유를 받고 하바드대학, 남가주대학, 콜롬비아대학 등에서 수학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역량을 쌓았다. 그리하여 1940년 12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제5차 대표대회에 몬타나지방 대표로 참가하여 중앙상무위원회 선전위원에 선임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합성협회(合成協會)가 발전적으로 통합한 국민회(國民會)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탄생한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중앙총회 아래 북미 . 하와이 . 멕시코 . 시베리아 . 만주 등지에 지방 총회를 설치하였으며, 다시 지방총회 아래 116개의 지방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1941년 4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서 민족통일운동과 독립운동 강화라는 중대 임무를 띠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결성되어 하와이 호놀룰루에 의사부(議事部), 미주 로스엔젤레스에 집행부를 두었다. 김용중은 동 위원회의 집행부 선전과장에 선임되어 대서방 외교활동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았다. 그는 워싱턴에 주재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와 협조하며 태평양전쟁 하에서 재미동포들의 신분보장과 미국 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42년 2월에 개최된 한인자유대회를 준비하고 동 대회에서 단합하여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등 활동하였다. 이어 3월에는 뉴욕에서 개최된 26개국 동맹원탁회의에 참가하여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같은 해 9월 17일에는 할리우드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2주기를 맞아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라디오 방송을 하기도 하였다. 1943년 한국문제연구소를 창립하고 기관지로 『한국의 소리』를 간행하며 미국 정관계 및 국제기구의 요인들에게 한국의 실상과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는데 힘을 쏟았다. 미국 전쟁공보국에서는 그에게 대한국인 방송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자 미국의 대표적 신문인 「워싱턴포스트」지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한편 그는 1919년 이래 광복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 옵서버로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하는 등 한국의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부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