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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분기점, 2 · 8독립선언 39 썼는데, 이튿날 가마쿠라[鎌倉] 경찰서에 잡혀가 3개 월간 나올 수 없었다. 형이 조선총독부 최초의 조선 인 전매국장까지 지냈으나 소용없었다. 재일조선인의 감시자는 경찰이었다. 1933년 조사 자료를 보면, 경찰은 관할 경찰서 단위로 7종류의 양 식에 호수와 인원·분포·직업·이동·범죄·집단취업장 소 상황 등을 상세히 기재해 매달 상부에 보고했다. 경찰은 수시로 조선인이 거주하는 하숙이나 일터로 찾아가 매의 눈으로 살피기도 했다. 얼마나 꼼꼼한 감시와 관리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감시와 관리 체계에서, 검거와 중 형의 폭압 속에서도 왜 조선인들은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도일(渡日) 후 일본 사회에서 민족차별을 경험하면서 식민지의 구조적 모순과 독립의 당위성 을 절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민족차별과 식민지 구조적 모순이라는 벽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넘어서도록 한 계기는 2·8독립운동과 시나노가와[信濃川] 조선인 사건(1922년), 관동지진 조선인 학살(1923)이었고, 2·8독립운동은 바로 첫번 째 분기점이었다. 시나노가와 조선인 학살이 조선인 의 조직화를 절감한 계기였다면, 2·8독립운동은 3·1 운동과 재일조선인운동 및 국내외 민족운동으로 이 어지는 마중물이라는 의미가 있다. 1910년대 재일조선인의 직종 가운데 학생은 적 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특히 도쿄 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1915년 도쿄의 학생 비율은 66%였다. 유학생들은 도일 직후부터 단체를 조직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위의 <표>에서 가장 오래된 단체는 유학생단체였 고, 대표적인 단체는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와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이하 학우회)이다. 기독청 년회 임원 가운데 다수는 학우회의 임원이기도 했 다. 학우회는 도쿄 유학생의 구심체를 담당했던 대 한흥학회(1909.1 결성)가 강제병합으로 해체된 후 1912년 10월 27일에 7개 지역별 친목회를 총합해 학우회를 결성하고, 전국 조직으로 확산해나갔다. 지역 연도별 단체 결성 현황 도쿄 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1896),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이상 1906), 와세다대학조선동창회, 재일본동경대학유학생학회(이상 1907), 재일본대한장학회(1909), 재일본조선유학생친목회(1911),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1912),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1914), 반도웅변회, 조선학회(이상 1915), 동경노동동지회, 노동동사회, 호남친목회(이상 1917), 조선고학생동우회(1920), 흑도회, 천도교청년회(이상 1921) 오사카 재판(在阪)조선인친목회(1914), 동맹합자회(1916), 합동회재단(1918), 조선인저금회(1919) 교토 경도(京都)조선유학생회, 경도조선유학생친목회(1915), 경도조선인노동공제회(1920) 효고 조선인효고간친회(1919) 고베 조선노동제진회(1920), 3.1청년회(1921) <표> 1896~1921년간 재일조선인 합법단체의 지역별 연도별 결성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