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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구국계몽운동과 신민회 39 구국계몽운동은 대한제국 후기의 구국 운동이 계몽운동과 의병전쟁 의 두 축으로 전개되었다는 관점에 서 ‘구국의병운동’과 짝을 이루어 만 들어진 용어이다. 20세기 초 정부 주도의 국가 근대화가 사실상 좌절 되고 국권 유지마저 위태로워지는 상황을 맞이하여 민간에서 자발적 으로 국가 근대화와 국권 수호를 위 한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대한제국 후기는 을사조약, 고종의 강제양위 와 정미7조약, 군대해산 등 일본의 국권 침탈이 이어지고 마침내 일본 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한 암울한 시기였다. 하지만 한 민족은 구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의 양면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절망의 시기’를 ‘대분발의 시기’ ‘민족역량 증강의 시기’로 역전시켜 훗날 나라 를 되찾아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기 초를 만들었다. 구국계몽운동·애국계몽운동·계몽운동 등 다양한 용어 쓰여 구국계몽운동은 국권 상실의 위기감이 높아지던 대한제국 후기에 교 육과 실업 등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길러서 국권을 지키려는 운동이었 다. 1897년 10월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시작된 대한제국은 국정 참여를 요구하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1898년 12월 강제해산시 킨 다음 전제군주제를 확립하고 위로부터의 국가 근대화 프로젝트인 ‘광무개혁’을 실시했다. 하지만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 군이 한반도를 점령하면서 고종(광무황제)의 통치권이 제약받고 대한 제국의 국정 운영이 차질을 빚게 됐다. 정부 주도의 국가 근대화가 사실 상 좌절되고 국권 유지마저 위태로워지는 상황을 맞아서 민간에서 자 발적으로 국가 근대화와 국권 수호를 위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구국계몽운동은 대한제국 후기의 구국 운동이 계몽운동과 의병전쟁 의 두 축으로 전개되었다는 관점에서 ‘구국의병운동’과 짝을 이루어 만 들어진 용어이다(조동걸). 그런데 같은 역사적 실체를 가리키는 보다 일 반적인 용어는 애국계몽운동이다. 1949년 간행된 손진태의 『국사대요 (國史大要)』에서 처음 사용된 ‘애국계몽운동’은 1970~80년대를 거치면 서 강재언·신용하·유영렬 등이 받아들이면서 널리 알려졌다. 1980년대 말 애국계몽운동이 문명개화를 절대시하고 의병전쟁을 부정하는 등 계 급적 한계를 보였다는 관점에서 ‘계몽운동’으로 불러야 하다는 주장이 나왔다(김도형). 또 다양한 방법론과 목적을 가졌던 실력양성 운동을 애 대한제국기 언론사의 편집 모습 『대한매일신보』 한글판(이상 국가보훈부 제공) ‘애국계몽운동’ 용어를 처음으 로 사용한 손진태(1900~?)의 『국사대요』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