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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대종교 지도자 홍암 나철의 현실 인식과 대응 39 나철에 의한 대종교의 중광(重光)은  절망적 현실 속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북돋워 준 일대사건으로, 우리 민족 사의 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 다. 역사 속에 침잠되어 오던 단군신 앙의 부활을 통해, 당시 주권을 잃어 버린 암울한 민족사회 전반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또 민족정체성의  와해 속에서 방황하던 수많은 우국지 사들과 동포들에게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했다. 일제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했던 나철의 항일투쟁은, 이러한 요 소들을 포괄하는 정신(道, 단군사상) 을 토대로 운용되었다. 그 정신(도)의  종교적 구현이 대종교 중광이요 물리 적 행동이 무장투쟁이었다. 또한 그  언어적 구현이 한글 투쟁이었고, 그  역사적 노력이 중화사관과 일제관학 에 대항한 민족주의 역사학 확립이었 다. 나철이 강조하는 정신을 몸통으 로 하여 문화·정치·외교·종교·무력투 쟁 등을 쓰임으로 하는 총체적 항일 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시대 배경 – 개인의 영달을 버리다 나인영(羅寅永, 1863~1916, 대종교 중광 이후 羅喆로 개명함, 이하 나철로 칭함)은 가난하고 한미한 양반가 출신이다. 늦은 나이에 상경하 여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과 인연을 맺으며 과거 준비를 통해 입신 하였다. 29세(189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를 시 작으로 병조사정(兵曹司正), 승정원 부정자(副正字) 등을 역임하였으나, 국운이 쇠해감을 보고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벼슬길을 포기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내우외란이 그치지 않 고 국운이 쇠퇴해 가던 시기였다. 동학농민전쟁(1894년), 청일전쟁 (1894년), 을미사변(1895년) 등 실로 미증유의 사건들이 연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서 보여준 고위 지도층의 행태는 관료적 병폐로 나타나는 가렴주구나 일삼고, 친청파·친일파·친러파 등 등으로 갈리어 국가와 민족은 안중에도 없었다. 나철의 벼슬에 대한 염 증과 우국적 울분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나철의 우국적 행보에는 김윤식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가 김 윤식의 배경으로 서울 상류 문인 층에 접할 수 있었고, 그의 절대적인 후원에 힘입어 과거에 급제했기 때문이다. 나철이 벼슬길에 나아간 후 에도 정치적 후견인로서의 김윤식의 역할은 끊이지 않았으며, 김윤식 과 5년간의 제주도 유배 생활을 함께하기도 했다. 김윤식은 대동아공 영권을 주장했던 오카모도[岡本柳之助]를 위시하여 많은 일본의 국수 적 인물들과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이다. 나철이 구국 운동의 첫 행보를 의병항쟁과 같은 적극적인 무력투쟁의 방법을 취하지 않고, 1905년 이후 몇 번의 도일(渡日)을 통해 민간외교적 교섭을 통한 동양 평화론을 들고 나온 것도 이러한 김윤식과의 배경이 있었다. 나철이 김 윤식의 영향 속에서 개화론·자강론·외교론의 지식을 경험했음은 물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거물들과 만나 정치적 독립의 당위를 따 질 수 있었던 것도 김윤식의 인맥 및 소개와 무관치 않았다. 그러나 나철의 이러한 민간외교적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에 도장을 찍은 매국대신들을 처단하기 위 해 이기(李沂)·오기호(吳基鎬)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적극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