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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북간도 · 연해주 항일무장투쟁의 설계자, 홍범도와 최병준 39 이 소식을 들은 최병준은 이범윤 부대원들을 불러 서 “두 사람을 암살한 것은 내가 그들 행동이 수상하 여 일탐으로 알고 처단하라고 명령하여 죽였으니 내 과실이지 홍용환과 최찬식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했 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늙은 혁명자로서 젊은 혁명 자 두 사람을 죽였으니 내가 죽어야 마땅하다”고 말 한 후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그렇 게 최병준은 홍범도의 아들과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비극적 희생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살아 남은 두 사람은 이후 항일무장투쟁의 후속 세대로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홍범도와 최병준 활동의 역사적 의의 우리가 흔히 말하듯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이긴 것은 독립군 자체의 전투 능력과 전술이 훌륭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역 한인 주민들의 열성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 에 가능한 일이었다. 홍범도와 최병준은 1908년과 1910년의 국내진공작전 실패에서 이를 깨달았다.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결코 단기적 인 차원에서 일본군과 몇 번 싸워서 이긴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무 리 의병들이 잘 싸운다고 해도 충분한 군자금과 식량 보급, 무기 보급과 비상시에 피신하여 몸을 숨기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확보되지 않으면 결국 일본의 끈질긴 추적으로 인해 의병조직이 와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1911년 이후 중장기적 시각에서 의병(독립군)운동을 이끌어 가기 위해 나름의 규칙 을 만들고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독립군 부대를 조 직하는 것을 목표로 약 9년에 걸쳐 준비했다. 그 과 정에서 홍범도와 최병준은 서로 역할 분담을 해 가 며, 군자금을 마련하기도 하고, 무기를 구입, 은닉하 기도 하며, 의병(의용병, 독립군) 부대원을 모집 · 육 성 · 훈련하고, 의병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하여 혼춘의 태평구, 밀산의 한흥동, 추풍의 당어재골이라는 독립군 ‘인큐 베이터’ 공간을 확보했다. 그런 점에서 1910년대 최 병준과 홍범도의 활동은 지속가능한 무장독립투쟁 의 모델을 구축함으로써 1920년대 독립전쟁의 기본 적 틀을 마련한 설계자이자 독립군을 길러낸 산파로 서의 역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특임강의교수로서 한국학 및 한국사에 대해 강의하고 있으며, 홍범도아카데미 전문위원 겸 홍범도기념사업회 편집위원을 맡고  있 다. 주요 저서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가 있다. 필자 임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