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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인 정책과 재만 조선인의 동향 39 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중국 동북지역은 오늘날에 도 여전히 한국인들에게는 중요한 지역으로 각인되 어 있다. 만주국은 건국부터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처리문 제에 골몰하였으며, ‘치안유지’라는 방법으로 그들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만주사변’의 여파가 한인들의 재이주를 초래할 만큼 만주지역 전체를 요동치게 하 였기 때문에 만주지역의 ‘치안’불안은 만주국 입장에 서는 국가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요소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주를 잃은 중국 인은 곳곳에서 동북의용군을 결성하였으 며,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용군과 한중연합작전으로 반만(反滿)항 일전선이 형성되었다. 요녕성(遼寧省) 흥 경현(興京縣, 현 新賓縣)에 본부를 둔 조선 혁명군의 총사령관 양세봉(본명 梁瑞鳳) 은 요녕민중자위단과 연합하여 1933년 청원현(淸原縣) 전투와 영릉가(永陵街) 전 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총사령관 양세봉이 1934년 순국하면서 조선혁명 군의 활동은 크게 쇠퇴하였다. 한편 이청 천을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군은 이두, 정 초 등 길림자위군과 또는 중국 구국군과 연합하여 중동선 일대에서 싸웠다. 1932 년 9월 쌍성보(雙城堡)전투, 1933년 2월 경박호(鏡泊湖) 전투가 그것이다. 이후 한 국독립군 계열의 지도자들이 관내 이동 을 모색하면서 점차 동북지역의 항일독 립운동의 주도권은 공산주의계열로 넘어 가기 시작하였다. 1933년 만주국의 ‘치안유지’를 표방한 항일독립군 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가속화되면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1사가 성립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1 사는 주로 반석현(磐石縣)을 중심으로한 유격대가 그 골간이었으며, 제2군은 주로 연변지역을 거점으로 조직되었다. 주로 유격대를 근거로 활동하던 동북인 민혁명군은 1936년 이른바 8.l선언의 토대 하에 동 북반일연군 군정연석확대회의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 결의에서는 동북항일통일전선을 확대함과 동시 1920년대 중반 참의부 간부와 독립군의 모습(독립기념관 제공) 중국 신빈현 평정산진에 있는 의암 유인석 기념원(월드코리안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