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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후기의병기 의병들의 국권수호 항쟁과 일제의 사법탄압 39 구축하는 등 경기 · 강원 · 충청 · 경북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은 중기의병기에 이어 후기의병기에도 지속적으로 활동 했다. 중기의병기 산남의진을 이 끌던 의병장 정용기가 전사하자 아버지 정환직이 아들 대신 의병 장이 되어 부대를 수습하고 재편 했다. 1907년 9월 새롭게 편성된 산남의진은 청송과 영일 일대를 근거지로 항쟁을 지속했다. 신돌석의병부대는 1907년 말 이후 중기의병기와 비교해 투쟁양상이 변화하였다. 일본군의 적극적인 ‘토벌’ 작전에 ‘반토벌’ 작전으로 대응한 것이다. 일본 군경은 이후 몇 차례의 진압작 전을 더 실시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토벌작 전 실패가 계속되자 의병에 대한 회유책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전라도지역 의병은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 · 김 동신 의병부대 · 심남일 의병부대 · 안규홍 의병부대가 중심이 되었다. 1906년 거병했던 태인의병은 전라 지역 각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반일 감정 은 더욱 고조되었다. 기삼연이 중심이 되어 1907년 10월 30일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전라지역 의병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김동신 · 고광순의 의병부대는 호남의병이 본격화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동신 은 기우만 · 고광순과 함께 1907년 의병을 일으키고 ‘삼남창의소’라고 불렀다. 부대의 구성원은 주로 삼 남지방인 충청 · 경상 · 전라도 출신이었다. 김동신 부대 의 의병항쟁은 1907년 9월 순창의 우편취급소를 공 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김동신 의병부대는 지리산을 기반으로 전라도는 물론 경상 서부지역까지 활동하 였다. 일본인을 몰아내자는 격문을 발송하면서 의병 을 빙자해 민간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행위를 근절시 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강점 이후에도 이어진 항쟁과 일제의 사법 탄압 남한대토벌 작전 이후 주요 의병 세력은 사실상 국내에서 활동하기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1910년 8 월 일제 강점 이후에도 미약하지만 국내에서의 의병 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강점 이후 의병은 3가지 동향 을 보인다. 첫번째는 일제의 감시가 덜한 산악지역 으로 들어가 항전을 계속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해 외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마지 막은 일반 민중 속으로 잠입하는 방법이었다. 강점 이후 활동을 이어간 대표적인 경우는 채응언 일본군의 소위‘남한 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된 호남의병장들(『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 첩』, 1909, 국사편찬위원회).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양진여 의병장, 오른쪽은 심남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