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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20년대 초 독립운동 상황과 「조선혁명선언」 39 개 항으로 설명했다. 이 가운데 “일본 군국주의에 대 하여 폭력 혁명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 민 족 해방을 위해서는 민중을 각오시켜야 한다, 우리 의 폭력 혁명운동은 우리의 민중을 각오시키기 위한 것, 우리의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독립과 민 족의 해방을 이룩할 때까지 굳세게 싸워야 한다”는 등 항목이 주목된다. 「조선혁명선언」은 일제강점기 한국독립운동이 낳 은 가장 귀중한 문헌의 하나로서, 단재가 아나키스 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 다. 신채호가 의열단과 관계를 맺은 것은 1920년 가 을 무렵이었다. 이때 의열단이 베이징으로 옮겨와서 반임시정부 세력에 동참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김원봉은 단재가 주도했던 「성토문(聲討文)」에 서명 한바 있다. 이로 인해 단재는 김원봉을 이전부터 알 고 있었다. 단재는 직접 의열단에 가입하거나 참가 하여 활동하지는 않았으나, 깊이 관여한 흔적이 보 인다. 단재는 김성숙을 의열 단에 추천하여 선전부장이 되게 하였으며, 김창숙과 함 께 나석주 의거에 관여하여 그에게 폭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은 이같 은 배경에서 의열단의 정신 적 지주와 같은 위치에 있던 단재가 류자명의 지원을 받 아 작성한 것이다. 1개월여 의 산고 끝에 완성된 「조선혁 명선언」은 1923년 1월 즉각 인쇄되어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대표들에게 배포 되었는데, 단재의 웅혼한 필치는 단원들은 물론 읽 는 이들을 모두 감격하게 했다. 의열단은 「조선혁명 선언」의 끝에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라는 부속 문 서를 첨가하여 인쇄하였는데, 단원들은 폭탄과 함께 이 문서를 지니고 활동을 펼쳤고, 현장에 이를 살포 하여 자신들 행위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하였다. 단재가 의열단의 선언문을 작성하며 이를 「의열단 선언문」이라 하지 않고 굳이 「조선혁명선언」이라 한 것은 여기에 표출된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론 등을 단순히 의열단의 활동을 넘어 독립운동을 급진적 민 족주의 혁명으로 개념화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당시 류자명은 임시정부의 김구 · 이동녕 · 이시 영 · 조완구 등과 연락하고 있었는데, 이 선언문을 조 완구에게도 보내주었다. 이를 본 조완구는 이 선언 은 우리의 민족적 정의심을 표시한 것이라고 하면서 ‘조선혁명선언’ 표지와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