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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6.10 만세 운동과 더불어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3.1 만세 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당시 학생들의 항일 투쟁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53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해놓았다.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다 | 민족 말살 반대 항쟁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한 이후 시대에 따라 지배하기 유리하도록 통치 방식을 바꾸었다. 1910년대에는 헌병 경찰을 앞세워 강압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가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무단 통치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여 학교를 건립하게 하거나 한국어 신문을 허가해주 는 등 문화 통치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겉으로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는 듯 하 였지만, 실상은 친일파를 양성하여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교묘한 술책이었다. 1930년대 접어들어 일제는 제국주의로서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31년 만주 사변, 1937 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더니 1941년에는 미군기지가 있는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 켰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우리의 땅을 병참기지로 삼기 위하여 우리 민족을 더욱 탄압하고 수탈하였다. 아울러 우리 민족의 혼과 민족성을 완전히 말살시키는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본인으 로 만들어 일제에 우호적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 일 본와 조선은 같은 조상을 두고 있다는 일선동조론, 일제의 신민으로 만든다는 황국 신민화 등을 구호로 내걸고 우리나라 말과 글을 사용하는 대신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우리나라 역사 를 배우는 것을 금하였다. 또한 한글 신문들 과 한글 잡지들의 발행도 모두 금지하였다. 더 나아가 신사참배, 일제 신민으로서 서 약을 외워 맹세하는 황국 신민 서사 암송,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는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였다. 징병제와 징용제도 강제로 실 시하여 우리나라 청년들을 일본, 중국, 동 남아시아 등지로 강제로 동원하였고, 여자 들은 정신대라는 이름하에 일본군 위안부로 만들기 위해 전국에서 강제로 소녀들을 끌 고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1930년대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교역자와 신도들이 서로 연대하여 신 사참배 저항운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