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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25년 5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귀환과 해방 정국’ 운데서도 귀국 길에 나서는 조선인들은 길을 가득 매울 정도였다.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일본군에서 탈출, 조선의용 군에 입대하고 광복 직후 심양으로 들어와 근교 조 선인 마을에서 1개월 정도 생활했던 신상초는, 만 주 현지의 한국인 동포들은 쌍수를 들 어 의용군을 환영했고, 의용군의 주둔 자체가 조선 농민들에게는 큰 보호와 위안이 되었다고 회고하였다(신상초, 『탈출』, 1977). 그러나 신상초가 파악하지 못한 일 이 당시 심양 바깥에서 전개되고 있 었다. 그것은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 의 국민당과 공산당은 만주 장악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다. 양측은 본토(관내)에서 각각 대 규모 부대를 만주로 북상시키고 있 었다. 국·공 양측의 군대는 만주 입구 인 산해관(山海關) 점령을 위한 사투 (1945.10.25~11.16)를 벌이고 있었 다. 국민당과 공산당, 특히 중국공산 당은 만주 석권을 위해 독립동맹·조선 의용군을 동원코자 했던 것이다. 1945년 11월 7일 소련점령군과 중 국군(특히 팔로군) 그리고 조선의용군 은 심양 역 광장에서 러시아 혁명기념 식을 함께 거행하였다. 그 후 1,000여 명의 조선의용군은 심양 교외의, 조선 인 학교인 오가황(五家荒)소학교와 그 일대의 숙소에서 밤을 보냈다. 며칠 후인 1945년 11월 10일 낮 독립동맹·조선의 용군 대원 전체가 오가황소학교 운동장에 대오를 갖 춰 집합하였다. 이날 사열대 위에 선 조선의용군 사 령관 무정은 독립동맹·조선의용군 간부회의의 다음 과 같은 결정사항을 발표하였다. 첫째 조선독립동맹 한중 연합항전 구호를 중국인 촌락 담장에 쓰고있는 조선의용군(나무위키 제공) 만주로 북상하면서 호가장전투 전사자 묘역을 참배하는 조선의용군(19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