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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24년 11월 Special Theme 11 · 3(광주)학생독립운동 제95주년 특집 ‘11 · 3(광주)학생독립운동을 다시 본다’ 분 금지하고, 1941년 태평양전쟁 도발 이후 인력동 원과 물자징발을 위한 본격적인 전시체제를 강화하 였다. 일본 육군대장 출신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 昭]는 1942년 5월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며 위협적인 통치방침을 발표하였다. “조선은 이역(異域)이 아니 라 구주사국(九州四國)과 같이 황국(皇國)의 일부이 며 불온한 생각을 하는 무리에 대해서는 단호히 처 단한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일제는 황국신민 사상 을 강제하고 한국인에 대한 예비검속 등 감시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수상해 보이는 한국인들은 검거하여 고문하는 가혹한 탄압을 자행했다. 이러한 전시체제 하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도 사 라지고 민족정기를 되살리려는 단체활동도 극도로 위축되자 학생들은 지하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 갔다. 이 시절의 대구지역 학생비밀결 사로는 대구사범학교의 연구회(1941), 대구공립상 업학교의 태극단(1942~1943)이 있었는데, 본고에 서는 필자의 선친이 활동했던 태극단을 살펴보 고자 한다. 태극단의 비밀결사 활동 1942년 5월, 대구공립상업학교에 재학중이던 이 상호 · 서상교 · 김상길은 일제의 식민체제에 항거하 는 비밀결사 태극단(太極團)을 만들어 본격적인 항일 지하운동을 통한 국권회복에 앞장서기로 뜻을 모았 다. 이상호는 전과목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이 른 바 ‘조행’ 점수가 최하위이고 국어(일본어)시험에 백지답안을 내서 유급처리 되었다. 이들은 중국혁명 의 아버지라 불리던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 義) 서적 등을 탐독하였고, ‘우리 청소년들의 일제군 대 입대 기피 및 그들 전쟁에 대한 비협력으로 독립 투쟁에 적극 참가할 것’을 호소하는 유인물 살포 등 을 점선조직으로 산발적으로 전개했다. 이후 전국적 으로 광범위한 학교별 지역별 조직활동을 전개하고 대구상업학교의 비밀 항일결사단체인 태 극단 단장 이상호(영남일보 제공) 태극단 단원 서상교의 유도부 시절 모습 (왼쪽) 출옥 직후(1945.8.18)의 서상교(이상 필 자 제공). 여러 질환으로 얼굴이 부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