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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24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기획특집 ‘한국독립운동과 백두산’ 고, 1908년 4월 명동촌 내의 규암재(圭巖齋)를 비롯 한 기존 3개의 서당을 합하여 명동서숙을 창립하였 다. 명동서숙은 서전서숙의 교육과 정신을 계승한 근대 교과과정의 학교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9 년에 명동서숙은 북간도교육단의 일원으로 간도에 파견된 정재면이 교사로 부임하면서 학교 이름을 명 동야소교(明東耶蘇敎)학교로 바꾸고 기독교 교육학 교로 변모하였다. 또한 명동교회를 설립하고 마을 공동체 전체가 기독교 복음을 통해 독립운동을 이어 가고 근대 민족교육을 도입하였다. 이어 명동학교는 1910년 중학부, 1911년 여학부를 설립하여 “항 일독립의식을 가진 인재양성”을 교육목표로 학교 는 크게 발전하였다. 대종교의 거점 청호촌 용정의 비암산을 거쳐 화룡으로 가는 길옆에는 청호촌(淸湖村)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대종교 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14년 5월 단군신앙의 종 교적 성지인 백두산 기슭의 이곳 화룡현 청파호 로 대종교 총본사를 옮기게 되었다. 대종교는 여 러 곳에 교구를 설치하고 교세를 확산하고 독립운 동의 거점을 마련하였다. 2세 교주인 김교헌 시대 (1916~1923)에는 신도의 수가 30만 명을 넘어설 정 도로 교세가 확산되었다. 특히 청산리대첩의 한 축 인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가 주로 대종교도들로 이 루어졌다는 사실을 잘 알려져 있다. 청호촌 마을의 맞은편 언덕을 약 100m정도 오르 면 콘크리트 기둥을 철망으로 이어놓은 울타리 안 에 세 개의 묘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이것은 대종 교의 나철·서일·김교현 3종사(宗師)가 안장된 산소이 선바위에서 본 명동촌, 삼용도로와 오랑캐령. 그 뒤에는 두만강이  있다(2007.5). 예전 은진중학교 건물. 현재 군부대이며 맞은편에 명신여학교 가  있었다(2007.5, 용정) 1930년대의 은진중학 교사(경향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