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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24년 2월 Special Theme  신간회 창립 97주년 특집 “한국독립운동과 신간회” 한 논의에 착 수했다. 연정 회는 1923년 말부터 1924 년 초 『동아 일보』의 송 진 우 ( 宋 鎭 禹) · 김성수 (金性洙), 천 도교의 최린 (崔麟) · 이종 린(李鍾麟), 기독교의 이 승훈 · 조만식 (曺晩植), 그 리고 신석우 (申錫雨) · 안재홍(安在鴻) 등이 모여 결성을 논의한 단 체였다. 그러나 1924년 1월 이광수(李光秀)가 『동아 일보』에 연재한 「 민족적 경륜」 이 문제가 되면서 더 이상의 논의가 진행되 지 못하고 무산된 단체 였다. 당시 민족주의 세력은 결성 논의가 어 느 정도 진행되었던 연 정회를 부활시키고 이 를 구심점으로 ‘민족적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자 한 것이다. 문제는 연정회 부활 논의에 천도교 신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최린이 참여했다는 것이었다. 최린은 일찍부터 식민지 조선에 필요한 것은 독립이 아니라 일제 식민권력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내는 것이라는 점을 주장했으며, 조선총독부 측 인사와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실제로 자치운동을 추진한다 는 의혹을 꾸준히 받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1926년 하반기 연정회 부활 논의에 최린의 참여가 확인되면 서 민족주의 세력 내부에서 논란이 제기됐다. 대표 적으로 최린의 노선에 반대했던 이종린과 안재홍은 최린의 참여에 크게 우려하며 자치운동과의 연관성 에 대한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민족주의 세력 내부 에서 연정회 부활과 자치운동의 연관성에 관한 의혹 이 제기되자 연정회 부활 논의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다시 한번 무산됐다. 이처럼 자치운동과의 연관성이 문제가 되면서 연 정회를 통한 ‘민족적 중심세력’ 형성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민족 주의 세력은 최린과 같이 자치운동을 주장하는 ‘타 협적 민족운동’에 맞서 ‘비타협적 민족운동’의 필요 「정우회 선언」에 관한 언론 보도 1(『조선일보』 1926.11.18) 「정우회 선언」에 대한 전진회의 검토문(『조선일 보』 1926.12.18) 「정우회 선언」에 관한  언론 보도 2(『동아일보』1926.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