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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23년 7월 Special Theme  6 · 25전쟁 정전70주년 특집 독립군 · 광복군에서 국군으로 활약한 인물들 화강(火崗) 이준식(李俊植, 1900  ~1966)은 1900년 평안남도 순천 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으 로 망명하여 중국의 명문 군관학교 인 운남강무당에 입학해 독립군 장 교의 자질을 쌓았다. 이후 중국 동 북지방(만주)으로 가서 항일독립군  연합단체인 통의부와 정의부 등에 서 간부로 활약했다. 특히 1930년 대 초 조선혁명당 산하 독립군인 조 선혁명군 총사령을 맡기도 했다. 또  중국군의 고위 장교가 돼 일본군과  싸우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물 밑에서 지원하기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0 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핵 심간부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해방이후 국군지휘관이 돼 1950년  6·25전쟁(한국전쟁)에서 혁혁한 전 공을 세웠다. 개전 초 국군 3사단을  지휘하며 경북 영덕지구에서 북한 군을 격퇴, 국군이 낙동강전선을 지 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독립군 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의 핵심지휘 관이었지만, 한평생 묵묵히 군인의  길을 걸었던 ‘대한민국의 호국영웅’ 이었다. (편집자 주) 이준식의 운남강무당 졸업 관련 새로운 주장의 검토 1945년 해방 이후 화강 이준식은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돌아와 정착한 곳은 북한이 아닌 남한이었다.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평안남도 순천(順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패망 이후 중국에서 독립전쟁에 참여하던 그가 귀국하기로 결 심하고 선택한 곳은 고향이 자리한 북한이 아니었다. 사실 그에게는 생 경하다고 할 수 있는 남한이었다. 이러한 그의 결정은 어찌보면 당연하 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인생 전반을 돌이켜 보면 이러한 결정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 그가 국군에서 복무하던 당시에 작성된 ‘장교임관순대장’ (將校任官順臺帳) 등을 살펴보면 화강 이준식은 ‘최종학교명’을 ‘운남군 관학교’(雲南軍官學校)라고 기록하였다(노영기, 「 군 자료를 통해 본 한국 군의 창설과 변화 」 , 『역사문제연구』 48, 2022). 『독립유공자 공훈록』5권 (1988)에서는 그의 초기 행적에 대해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1921년 에 운남성(雲南省)에 있는 강무당(講武堂) 학교를 졸업하였다’라고 서술 하였다. 이를 토대로 살펴보면 이준식은 1919년 3 · 1만세운동이 일어나 던 해에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검증이 필요하다. ‘장교임관순대장’에서는 그 의 출생일에 대해 ‘1899. 2. 28’ 이라고 기록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그의 출생을 1900 년이라고 명시한 것과 비교하 면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에 결정적으로 운남 강무당 관 련 기록과 연구 등을 살펴보 면, 그가 1921년에 졸업했다면 1919년 14기로 입교한 것이라 고 추정할 수 있다. 운남 강무당 (육군군관학교)에 재학한 한인 의 학생 수는 분명하지 않지만, 화강 이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