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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해방 전후 시기 조선독립동맹 · 조선의용군의 귀환과 동향 37 엽에는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본부가 태항산에 서 섬서성 연안으로 이동하였다. 8 · 15광복과 독립동맹·조선의용군의 만주 심양으 로의 북상 1945년 5월 독일은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같은 해 8월 3일 연합국은 독일의 포츠담에서 일본의 항복 을 촉구(포츠담 선언)하였다. 8월 6일과 9일에는 일 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 하되었다. 특히 1945년 8월 8일 소련은 대일 선전을 포고하고 다음날부터 소련군은 소 · 만(滿) 국경을 넘 어 만주(중국 동북지방)의 전 전선에 걸쳐 공격을 시 작하였다. 불과 일주일 만에 70만 일본 관동군은 궤 멸당했고 소련은 전 만주를 점령했다. 만주에는 화 북보다 몇배나 더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고 소 련군의 만주 공격과 만주국의 붕궤는 한국인들에게 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소련군의 만주 진격이 시작되자 화 북의 중국공산당 팔로군은 북상을 개 시하였다. 이에 발맞추어 연안의 독립 동맹(본부) 및 조선의용군 성원 300 여명은 1945년 8월 말 북상을 개시하 였다. 북상대오는 황하를 건너고 만리 장성을 지나 섬서 산서 내몽고를 거쳐 60일간의 행군 끝에 1945년 10월 말 만주의 심양(瀋陽) 교외에 도착하였다. 같은 무렵 여타 화북 각지 혹은 화중 에서 활동하던 독립동맹·의용군 역시 속속 같은 장소로 이동해 들어왔다. 북상하여 심양에 집결한 독립동맹·조 선의용군은 천여 명에 달하였다. 독립동맹의 북한 입국과 조선의용군의 만주 체류를 결정(1945.11, 심양) 북상한 독립동맹 · 의용군 대오는 심양 근교의 조선 인 촌락에 들어가 숙영하였다. 이후 1개월 정도 숙영 하는 동안 독립동맹·의용군 대원들은 현지는 물론이 고 만주 전체 조선인 상황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이 건립한 만주국이 궤멸된 가운데 괴뢰 만주국 군이 해산되었고 적지 않은 해산 군인(주로 중국인) 들은 도처에 무장한 상태로 무리를 지어 약탈과 살 인을 자행하였다. 특히 만주의 조선인 마을은 그들 에게 주요 목표물이 되었다. 무법천지 속에서 한국 교민들은 만주를 떠나 귀국하자니 그간 쌓아둔 생활 토대가 아깝고 만주에 남자니 목숨이 위협받게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였다. 그런 가 산서성(山西省) 운두저촌(雲頭低村)에 남아있는 조선의용대의 한글 구호. ‘왜놈 의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 오시오’라고 쓰여있다(희 미해진 글자를 최근 덧칠, 연합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