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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40년대 대구 태극단의 학생독립운동 37 태극단은 1943년 5월 9일 대구 앞 산 비파산에서 공식적 결단식을 갖고  일제에 대한 항쟁의지를 직접 밝히 는 조직명칭과 강령을 작성하고 군사 부 · 무도부 등 투쟁적 조직체계를 구 체화했다. 태극단은 민족자결이론을  바탕으로 다음 세가지 행동노선을 정 했다. ①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 이더 연구, 폭발물제조 등 군사학 연 구에 더욱 힘쓴다. ② 재정안정을 위 하여 각자의 재산을 각출하고 각처의  우국지사에게 지원을 받는다. ③ 우 국선배의 지도를 존중하며 전국적인  학교 및 지역별 동지조직이 완성되는  때에는 내외의 여론을 환기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조직적인 항쟁을 전 개한다. 국내투쟁이 불가능한 상황 이면 중국으로 망명하여 계속 투쟁한 다. 나이 어린 학생들 조직으로는 매 우 대담하면서도 선진적 구상을 실천 하려 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1920~30년대 동맹휴학의 전개 1919년 3 · 1 독립운동 이후에도 대구지역 학생들의 저항은 여러 형 태로 지속되었다. 1925년 2월과 3월 차별적인 학제와 일본인 교사들에 분노한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하며 다음 사항을 요구 하였다. 조선역사를 가르칠 것, 악질 일본인 교유(敎諭)의 축출, 조선인 교유의 증원, 생도에게 오는 서신검열의 중단. 그러나 학교 당국은 즉 각 경찰서에 연락하여 주모자를 검거하였다. 1929년 1월 대구공립상업학교의 동맹휴학운동은 1학년 일본인 학 생의 폭행과 이를 비호한 일본인 교사에 대한 분노로 발생했다.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학생을 난로 옆에서 발길질하여 화상과 두부파열상을 입히는데 럭비선수 정운균이 격노하여 일본인 학생에게 손찌검하자 일 본인 체육교유가 정운균을 무자비하게 구타하여 중상을 입혔다. 격분 한 학생들이 체육선생의 파면과 사과요구, 치료비의 학교부담을 요구 했으나, 교장이 이를 모두 무시하자 1주일간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이례적으로 학교 당국은 일본인 학생의 과오, 체육 교유의 지나친 행동, 주동자 전원이 학교의 명예를 빛난 운동선수이자 모범생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며, 한명의 학생도 처벌하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였다. 일제강점기 차별적인 학제의 대표적인 사례는 입학정원과 조행(操 行, 품행)점수다. 응시비율이 10배이상 높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입학정 원을 5:5로 하여 성적이 낮은 일본인도 합격하기 쉬웠다. 또 과목총점 과 조행점수를 5:5로 배정하여 한국인의 과목성적이 좋아도 조행점수 를 낮게 주면 최우수성적은 일본인 학생에게 돌아가게 하는 차별이 공 공연하게 자행되었다. 이에 대한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단순히 학교의 차별문제 뿐만 아니라, 일제의 통치에 대한 항거라는 점에서 효과적으 로 선동할 수 있는 조직체계의 필요성과 사상적 내실화가 배양되는 기 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40년대 일제의 전시체제 강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의 자유를 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