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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괴정 오상규의 한북흥학회 · 서북학회 활동과 애국계몽운동 37 필자 윤정란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일제시대 한국기독교 여성운동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의 여성, 종교(기독교), 항 일 운동, 한국전쟁 등에 관련된 연구를 오랫동안 수행해왔다. 현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역 사』 (2003),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서북을 호령한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2009), 『혁명과 여성』(공저, 2010) 등이 있으며, 다수의 논문이 있다. ‘경술국치’ 이후 서울을 떠나다 오상규는 1910년 8월의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하여 서울을 떠나 두메산골 충청북도 옥천읍으 로 이사하였다. 1917년 옥천에 발생한 대수해나 가 뭄 때 거금의 성금을 내 떠내려간 제방 등을 수축하 는 등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그는 두만강 강변의 국 경도시인 함경북도 회령의 명문가인 해주 오씨 자손 이었다. 대대로 벼슬길에 오른 사대부 집안으로 그 는 조선 후기인 1858년에 태어났다. 호는 회화나무 가 있는 회령 고향 서동 마을의 이름에서 따서 ‘괴정 (槐庭)’이라 지었고, 자는 경노이며 본관은 해주다. 괴정은 파평 윤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중묵은 대한제국 정3품의 비서감승을 지냈는 데, 차남 윤묵, 사위 이윤재 등을 두었다. 괴정 오상규는 조선말엽 조대비(趙大妃)의 친정 조 카인 병조판서 조영하의 천거로 1879년 무관직인 종6품인 선진관에 발탁돼서 처음 무신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후 1898년 12월에 정3품인 철도국장 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3월에는 농상공부 주사 주임 관 3등에 승진하였다. 1900년 2월에는 농상공무 참 서관에서 철도국장인 주임관 3등에 임명된다. 또 한 달 후인 1900년 3월 철도국장으로 중추원 1등 의관 에 임용되었고, 칙임관 4등에 승진하여 1900년 5월 까지 대한제국의 경인선 철도 부설과 경부선, 경 의 선, 경원선 부설 계획과 추진까지 큰 공적을 남겼다. 괴정은 을사늑약으로 자주권을 상실한 대한제국 의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한 계몽운 동 일환으로 사립학교설립운동과 국민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민족운동사에 큰 발자취 를 남겼다. 그의 인생역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옥천군에서 2018년 발간한 옥천의 역사 인 물 표지에 실린 오상규(오른쪽 아래, 충북일 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