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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연합작전 성과 37 한국광복군의 연합작전 성과 : 자유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여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주선으로 1943년 11월 22일 미국,·영국·중국의 3국 수뇌가 참석하는 ‘카이로수뇌회담(Cairo Summit Conference)’이 성사되었다. 이 회담을 앞둔 7월 26 일 김구 주석과 장제스 총재는 충칭(重慶)에서 ‘한· 중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김구 주석이 “영국과 미국 이 일정기간 국제공동관리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고 하는데, 중국 측은 현혹되지 말고 한국의 독립 요 구를 지지 관철해 달라”라고 요청하자, 장제스는 “한 국 측의 독립을 지지 관철하기 위해 역쟁(힘써 싸움) 하겠다”라고 공약하였다. 장제스는 실제로 카이로회 담장에서 전후 한국의 독립보장을 강력히 촉구했다. 영국 수상 처칠(Winston Churchill)은 한국의 자유 독립에 동의할 경우 인도의 대영독립운동을 촉발할 것이라고 하며 강력 반대하였다. 장제스는 영국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루스벨트의 지지를 촉구하였 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중국의 협조 가 절실했기 때문에 영국을 적극 설득하였고, 그 결 과 영국은 중국의 제안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리하 여 미·영·중 연합국 수뇌는 회담 후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이 자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했다’라고 발표하였다. 역사적으로 세계 열강이 특정 식민지 국가의 독립 을 공동으로 약속한 유례가 없고, 독립을 열망하는 100여 개 약소 민족들이 있었지만, 오직 한국만이 연합국에 의해 문서로 독립 보장을 약속 받은 것이 었다. 이는 실로 임시정부의 독립외교 노력과 독립 전쟁 노선의 승리요, 광복군의 연합작전 수행의 성 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광 복군의 뒷받침하에 임시정부가 중국을 움직였고, 중 국이 미국을, 미국이 영국을 각각 움직인 결과였던 것이다. 필자 김승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으며, 경기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방대학교 군교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 부장 등 을 역임했다. 현재 안중근홍보대사, 한국군사학회 상임 연구이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주요 논저로 『한국군 전력증강사 1(1945~1960)』(20 20, 공저), 『국방정책변천사(1988~2003)』(2020, 공저), 「대일항쟁기 한국인의 항일독립전쟁사상」『군사논단』105호(한국군사학회, 202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