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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석주 이상룡의 현실인식과 독립운동 방략의 변화 37 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좌우 합작 정부가 그대로 안 정되지 못하고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창조파와 개 조파로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좌우 합작 정부로서 기 능을 다하지는 못하였다. 이상룡은 독립운동에서 중 요한 것을 결집된 힘이라고 보았다. 많은 사람이 힘 을 모아야 하고 지휘와 명령 체계는 단일해야 한다. 이상룡은 당시 독립운동 노선이 분열된 것을 걱정하 였고, 그것을 위해서 통일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다. 임시정부는 창조파와 개조파가 격돌하는 가운데서 도 이상룡은 국외 무장 독립운동가들의 단결과 통합 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자신이 처한 서간도 지역 상황에서라도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 는 데 굳이 좌우가 필요치 않았고, 민족 해방이 우선 이라는 생각이었다. 민족운동 좌우파의 대립이 심한 가운데 이상룡은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된다. 그가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기 전에 이승만을 탄핵하 고 제2대 대통령이 된 박은식은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다. 적임자를 선택하여 자리를 넘겨주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박은식이 공의 (公議)를 수렴하여 선택한 사람은 이상룡이었다. 이상룡이 국무령이 되어서 한 일은 독립운동 노선 의 통합이었다. 그는 국무위원 임명에 남북 만주의 주요 인사들을 3부 요인에 거의 망라하였을 뿐만 아 니라, 독립운동 노선에서 고질병이었던 지방색을 감 안하여 평안도, 함경도의 서북은 물론 기호와 영남 출신의 인물도 기용하여 진용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상룡은 복잡한 정국 구조 속에서 결국 임시정부를 통합하지 못하고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그의 나이 69세의 고령이기도 하였지만 독립운동 노선 내 부의 갈등을 수습하지 못했고, 국무령으로 취임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기인한 것이었 다. 이상룡은 당시 중국 지역 독립운동 노선이 분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왜냐 하면 식민지로부터 독립하는 데 단합된 힘이 무엇보 다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 런 까닭에 좌익과 우익을 묻지 않고 통일전선을 형 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석주 이상룡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자 로서, 위정척사 사상에서 애국계몽운동과 무장투쟁,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 한 방식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의 생애 는 우리 역사 속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기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그의 업적은 오늘날에도 독 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데 큰 귀감이 되고 있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태동 고전연구소를 수료하고 독립기념관에서 근무했다, 순천향대·국립공주대·고려 대 등에서 강사를 역임하고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주 요 논저로 『근대유교개혁론과 유교의 정체성』, 『백년 동안 한국불교에 어떤 일 이 있었을까?』, 「정재 류치명의 현실인식과 대응」, 「석주 이상룡의 현실인식과  대응방략의 변화」, 「서산 김흥락의 이상과 현실 대응」 등이 있다. 현재 한국 근 대유학사와 근현대 불교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필자 김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