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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안성지역 3 · 1운동과 특징 37 안성군의 중심이자 안성시장이 열 리는 안성읍내, 구 양성군 지역인  양성면과 원곡면, 그리고 구 죽산군  지역인 일죽면, 이죽면, 삼죽면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또 구 양성 군, 구 죽산군에서도 수십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 다. 이 가운데 4월 1일 밤부터 이튿 날 새벽 사이에 있었던 원곡 · 양성  만세시위는 두 지역을 오가며 경찰 관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 일 제 관서를 공격하는 등 공격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점에서 특 별히 주목받아왔다. 하지만 기독교 나 천도교 등 종교계의 개입이 뚜렷 하지 않은 점, 안성읍내, 양성면과  원곡면, 죽산지역의 만세운동이 각 각 서로 다른 특징을 보였다는 점,  원곡 · 양성 만세시위는 마을공동체 를 기반으로 하는 민중의 자발적 연 대가 최고조로 고양된 사례라는 점 에서 차이가 있다. ‘독립국의 국민’ 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당연한 오늘 날, 적어도 3월에는 백년 전에 ‘독 립’이라는 말이 왜 그토록 수많은  민중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전국 3대 실력항쟁지 안성 안성시 원곡면에서 양성면 동항리로 넘어가는 만세로 고갯마루에 있 는 ‘안성3 · 1운동기념관’은 ‘3 · 1운동의 전국 3대 실력항쟁지’ 중의 하나 인 안성 3 · 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2001년에 설립되었다. 국사편찬위 원회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수개월 동 안 전국 각지에서는 최소 1,692건의 시위를 포함해서 2,500건에 이르 는 철시(撤市)와 동맹휴교, 파업, 그리고 실행에 이르지 못한 수백 건의 시도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안성을 ‘전국 3대 실력항쟁지’라고 특정한 것은 조선총독부 사법부의 손병희 등에 대한 「예심종결결정」에 다음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피고들은……3월 1일 이후 널리 이[독립선언서-필자]를 조선 내 각 곳에 배포함으로써 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도처에 많은 군중이 조선독립시위운동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또다시 사람을 조선 내의 주요한 시·읍에 파견하여 피고들의 기도를 선전케 한 결과, 예기한 바와 같이 피고들의 선동에 응하여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평안북 도 의주군 옥상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및 원곡면 등에서 조선독 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야기함에 이르게 한 사실”(「예심종결결 정」, 『독립운동사자료집』 5권, 13쪽) 여기서 말하는 안성군 양성면 및 원곡면의 독립운동은 1919년 4월 1 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 사이에 벌어진 만세운동을 가리킨다. 전국적 으로 만세운동이 벌어진 만큼 그 규모와 양상은 다양했다. 그런데 안성 의 이 만세시위는 식민지 사법부가 굳이 거론할 정도로 강하고 세찼다. 이틀간 식민지 행정기구와 주재소를 무력화시킨 이 운동의 대가는 가 혹했다. 뒤이어진 일제의 가혹한 검거와 보복으로 현장·옥중·부상 순국 자가 26명 발생했고, 177명이 투옥되어 최고 12년의 중죄 형량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41명은 태형을 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1인당 최 고 409엔에 달하는 손해배상금을 부담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