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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와 같은 군중을 이끌고 성주경찰서를 투석전으로 습격하다가 악독한 왜경들의 실탄발사로 많은 사상자를 내자 일부 군중은 해산되고 진두에서 지휘하던 선생은 30여명의 동지등과 3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피검되었는데 이때 심산선생의 장남 김환기 동지는 모진 고문 끝에 18세로서 순국하였고 왜경의 회유책으로 만세를 부르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은 모두 석방되었으나 주동인물로 지목된 30여명은 검찰에 송치되었는데 검찰에서도 다시는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은 석방되고 선생을 위시하여 성주읍 경산동 배상연 대가면 흥산동 백성흠, 칠봉동 김원술 용암면 동락동 노기학 벽진면 회수동 박경하 초전면 자양동 김구진 등 7명의 동지들은 끝까지 항거하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42조 제령 제7호제1조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소위 조선총독부 검사대리 사법관시보 藤野浩平의 관여와 대구지방법원 조선총독부판사尾家仁六의 판결로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는데 당시 재판소 서기 察奎明이 기록한 소위 판결문의 요지는 '피고 등은 구한국의 독립을 도모할 목적으로 1919년 4월2일 오후 1시경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내 시장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불온한 언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한 자들이므로 신구법에 따라 모두 징역형으로 양정처분키로 하고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하였다. 출옥후에는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만주와 일본 등지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심산선생의 지시로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모집에 헌신하였고 1921년 심산선생이 상해로 건너가자 석연선생의 독립공채모금운동에 종사하다가 1923년 석연선생이 투옥되자 향리에서 해양사업과 종족사업에 헌신하면서 여생을 마치시었다. 선생의 본관은 달성이니 이조판서 남은선생의 17세손으로 1900년 8월 27일 부친 상연공과 모친 성산이씨의 독자로 출생하였는데 초명은 병준이요 호는 성곡이다. 1981년 2월 23일 세상을 마치시니 향년이 82였고 묘는 경산동 두두무골 임좌에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성봉향여사와 아들...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