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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조선혁명군 국내유격대장 서원준의 생애와 독립운동 37 자금 십오만 원을 모금하려는 계획을 세우다가 발 각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서원준과는 평 양형무소에서 같은 시기에 복역하며 친분을 쌓았 을 것으로 보인다. 서원준은 이후 김관우와 함께 만주로 건너가 1930년 10월 조선혁명당 군사부 부사령이었던 양 세봉의 권유로 이 당에 가입하였다. 서원준은 조 선혁명당에서 약 2년 반 동안 피복제조창·자치부· 지방정세조사부에서 활동하였고, 그 활동을 계기 로 다수의 당원획득에 성공하였다. 1932년 11월에 고이허(高而虛, 본명 최용성)로부터 국내에 잠입하여 당의 활동 자금 오만 원을 모집하고, 중앙당의 연락 기관을 설치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이후 조선혁명당 으로부터 ‘조선혁명군 국내유격대장’이라는 직책을 받고 국내로 밀파되어 군자금 모금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서원준은 먼저 남만주 안동현(安東縣)의 조선혁명 당 연락원인 김병모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는 김병 모에게 소개받은 한신옥과 함께 국내 금융기관의 소 재와 현금집산 현황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그 뒤 1933년 1월 15일 남시 장날인 15일에 삼중상점의 점원인 고마쓰 신이치(小松信一)를 위협하여 현금 1,643원 14전과 72원짜리 수표 1매를 군자금으로 압수하였다. 그러나 일제 당국은 남시역 ‘평양권총청 년’ 사건에 어떠한 단서도 잡지 못한 채 사건을 종결 시켰다. ‘평양권총사건’으로 알려진 조선혁명군 국내특공작전 이후 서원준은 1933년 2월 평양 시내로 잠입했다. 평양에 도착한 뒤에는 노동운동을 하며 만났던 안영 준과 함께 오랫동안 조선은행, 식산은행, 상업은 행 등과 같은 금융기관의 습격을 계획했다. 하지만 오히 려 오랜 조사 기간과 습격 시도가 일제 경관의 의심 을 사게 되었다. 1933년 6월 3일 평양 고등계 형사 김원렬과 안락이 안영준의 집이 수상하다고 느껴 수 색한 것이었다. 이때, 서원준은 안영준의 집 문을 열 고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하였고, 곧바로 평양고보 운동장을 거쳐 만수대로 올라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서원준이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그가 어린시절을 지 냈던 평남 중화였다. 그는 7일 오후 5시, 중화군 양정 면 우현규의 집에서,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만 주에서 평양으로 왔으며, 지금은 일제의 수사를 피 해 도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뒤 우현규의 도움으 로 변장하기 위해 삭발하고, 우현규의 배를 타고 곤 양강 지류를 타고 대동강, 겸이포로 이동했다. 이동 사이마다 우현규는 친척 등과의 연락을 위한 연락 망을 자처하기도 했다. 황해도 겸이포에서 하선하여 노동자로 변장한 후 도주 할 계획이었지만, 일제 경 찰의 삼엄한 경비로 차질을 빚게되었다. 이에 결국 대동강 하류로 이동한 후 우현규와 헤어졌다. 1933년 6월 3일 오후 10시부터 도주를 시작한 서 1920년대 남만주 지방에서 활약한 참의부 독립군의 모습. 조선혁명 군은 참의부 독립군을 계승한 독립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