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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북간도 · 연해주 항일무장투쟁의 설계자, 홍범도와 최병준 37 홍범도의 밀산 생활 – 최병준의 추풍 당어재골 생 활 (1915~1919) 홍범도는 밀산을 독립군 기지로 부활시킬 계획을 세우고 밀산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의병들을 한 인 가호(家戶)마다 배치하여 농사일을 돕게 하고, 나 자구(羅子溝) 무관학교 출신인 정태에게 교육 사업 을 맡겼다. 그리고 밀산 일대에 여러 소학교, 고등소 학교 설립을 주도하고 스스로 한흥동(韓興洞) 학교의 교장직을 맡았다. 또한, 학교를 근거로 운동회, 연설 회를 열어 애국 사상을 고취했으며, ‘우리동무회’라는 청년단체를 조직케 하여 야학과 운동을 의무화했다. 홍범도가 연해주를 떠나 만주의 밀산으로 이동할 때쯤 최병준은 반대로 북간도의 혼춘을 떠나 연해주 지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은 바로 추풍 당어재 골이었으며, 이전에 홍범도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했 다. 최병준은 그곳을 아지트로 삼아 아편 재배를 통 해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그곳을 들른 독립운동가 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한편, 홍범도는 밀산 생활 시작 후 약 2년 반이 지 난 시점인 1918년 3월경 이만에서 구입한 총과 탄 약을 추풍 당어재골의 최병준 집으로 이송시켜 땅에 묻게 했다. 당시는 1917년 11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는 물론 세계 정세가 급변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내전에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간섭 군이 개입하며 연해주로 파병될 것이 예상되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다. 아마도 홍범도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세계 정세의 급변 속에 자신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던 당시를 상기하며, 언제 어떻게 급박한 일이 생겨 무기를 압수당할지 모른다는 판단 하에 이를 은닉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홍범도는 밀산에서 1년간 농사를 지으며 사태를 관 망했다.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 재개 - 최병준의 비극적 희생 (1919) 그러던 중 1918년 11월 제1차세계대전이 종결되 고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된 가운데, 국내에서는 고종이 승하하고 마침내 3월 1 일 독립선언문이 낭독되며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항일투쟁의 분위기는 간도와 연 해주까지도 퍼져서, 한인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만세 시위가 계속되었다. 홍범도가 있는 밀산에서도 쾌상별이(지금의 당벽진[當璧鎭])에 모여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한편 1919년 3월 말경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이 동휘(李東輝, 1873~1935) 등 한인사회당 세력이 비 홍범도가 활동한 밀산 십리와에 2009년 9월 세워진 ‘십리와 항일투쟁유적지 기념비’(반병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