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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국민대표회의와 개조파 그리고 ‘정부쇄신운동’ 37 부를 세울 때 ‘서북간도나 노령, 미주의 의사를 묻지 도 않았고 하물며 각원으로 선출된 사람들에게조차  조직 여부를 모르게 하는’ 등 과거 정부 조직과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자인했다.  그러나 정부 각료를 중심한 정부옹호파는 국민대 표회 소집을 ‘정부파괴운동’이라고 맹비난하며 임시 정부의 절대 지지를 주장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이런  혼란을 뒤로 하고 1921년 5월 태평양회의를 핑계로  미국에 건너가면서 국민대표회 지지파를 ‘다소의 불 평자’ 혹은 ‘음모자’로 비난하며 강력한 단속을 당부 했다. 정부옹호파의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1921년  8월 상하이, 베이징, 텐진 등지의 대표들이 국민대표 회주비회를 결성하면서 국민대표회 소집은 현실이  되었다. 국민대표회 소집은 결정됐지만 국민대표회 지지 자들은 그 목적인 ‘강고한 정부 조직’ 등에 대해서는  각자의 이념과 독립운동 노선에 따라 차이가 있었 다. 최대 차이는 임시정부 문제였고, 이 문제를 두고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해체 하고 신기관을 건 설하 자는 창조파로 나뉘었 다. 다만 임시대통령  탄핵에 대해서는 양파 가 같은 입장이었다. 창조파도 마찬가지 지만 개조파 역시 임 시정부의 개조 방안이  단일한 것은 아니었 다. 예컨대 안창호 등 의 흥사단계는 개조론 을 주장하면서도 최량의 방략으로는 실력양성론을,  이를 실현한 조직으로는 대독립당 건설을 주장했 다. 또한 여운형 등은 임시정부를 위원제 조직으로  개조할 것을 제안했다. 반면 윤자영 등 상하이파 고 려공산당계는 독립운동의 최량의 방략으로 독립전 쟁론을, 이를 실현할 기관으로 민족혁명당 건설을  주장했다. 이처럼 개조파는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큰 명분 에는 뜻을 같이하지만 자신들의 이념과 독립운동  노선에 따라 구체적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개 조파의 각 계열은 비공식 회의를 통해서 이러한 차 이들을 좁혀갔다. 개조파, 왜 임시정부 개조론인가 국민대표회 소집에 뜻을 같이하던 개조파와 창조 파는 정식회의가 열린 1923년 3월 5일부터 토론을  시작한 시국문제를 계기로 갈등이 본격화했다. 9일  윤자영 등 개조파는 국민대표회의에서 우리 독립운 동을 ‘1. 세계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과 동일전선이  1923년 6월 3일 개조파의 국민대표회의 탈퇴성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