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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20년대 초 독립운동 상황과 「조선혁명선언」 37 한편,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한 것에 부응하듯 낭 보도 있었다. 중국 관내(關內)지역과는 달리 만주지역  동포사회의 1920년은 하루하루가 전시 상황을 방불 케 하였다.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평가되는 봉 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이러한 배경에서 거둔 값 진 승리였다. 그러나 동포사회는 일제로부터 ‘경신참 변(庚申慘變, 일명 간도참변)’이라는 잔혹한 보복에 직 면했다. 정식 군대를 보유하지 못한 임시정부나 독립 운동 단체는 일본을 상대로 정식 전쟁이 아닌 ‘작탄’  의열투쟁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11월 10일 만주 지린(吉林) 시내에서 결 성된 의열단은 조국 독립을 위해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의열단은 창 단 때부터 활동 방향을 확고하게 결정하였다. 이는  ‘일곱 부류의 암살 대상과 다섯 가지의 파괴 대상(七 可殺 五當破)’ 선정으로 명확히 하였다. 암살 대상은  조선 총독 이하 고관 · 군부 수뇌 · 타이완 총독 · 매국 노 · 친일파 거두 · 적탐(밀정) ·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 劣紳) 등 일곱 부류였고, 파괴 대상은 조선총독부 · 동 양척식주식회사 · 매일신보사 · 각 경찰서 · 기타 왜적의  중요기관 등 다섯 기관이었다. 초기 의열단은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의 파괴와 요 인 암살 처단을 기획하여 1920년 여름부터 의거를  전개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의 발표 이전까지의 대 표적 활동으로는 ① 밀양 · 진영 폭탄 반입사건(제1차  국내기관 총공격 거사 추진, 1920. 6) ② 부산경찰서 장 폭살사건(박재혁 사건, 1920. 9) ③ 밀양경찰서 투 탄 의거(최수봉 의거, 1920. 12) ④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김익상 의거, 1921. 9) ⑤ 상하이 황포탄 의거 (일본 육군대장 저격, 1922. 3) 등이 있었다. 신채호와 류자명 1922년 3월 상하이 황포탄 의거의 실패는 두고두 고 아쉬운 일이었지만, 이 거사의 시도 자체가 지니 는 의미는 지대하였다. 즉, 한국인들의 민족 독립 · 자 유 쟁취의 열망과 용감무쌍한투쟁상이 전 세계에 알 려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반면 평소 의열단의 독자 행동과 정부 비판언동을 못마땅히 여겨온 임시정부 의 일부 인사들은 이 사건을 기화로 의열단의 운동 노선을 ‘공포 수단에 의지하는 과격주의의 소치’라며  공공연히 비난하였다. 즉, 의열단의 투쟁노선과 방법 론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또한 임시정부는 이  거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극구 해명하였다. ➌ ➎ ➍ ➌  신채호(1880~1936) ➍  류자명(1894~1985) ➎  상하이 황포강과 황포탄 부두(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