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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2025년 5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귀환과 해방 정국’ 정에 따라 조선의용대 주력은 1941년 초 황하를 건 넜다. 특히 같은 해 6월에는 화북 팔로군 작전지역인 태항산으로 이동하였고, 그 부대는 ‘조선의용대 화 북지대’로 불렸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중국공산당의 협조아래 진용을 정비하고 적극적인 항일무장 투쟁에 나섰다. 성과도 적지 않았지만 호가장(胡家庄)전투(1941.12)에서 대 원 4명이 전사하고 1명(김학철)은 중 상을 입은채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이듬해인 1942년 5월에는 최고위급 지도자인 윤세주와 진광화가 태항산 의 전투에서 전사하는 중대한 손실을 입었다. 화염이 그친 1942년 7월 태항산에 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화북조선청 년연합회를 확대해 화북조선독립동 맹(이하 독립동맹)을 결성하였다. 독 립동맹의 주석으로는 국민당 전시수 도 중경에서, 천리 길을 멀다하지 않 고 온, 김원봉의 최측근이자 한글학자 로 이름 높았던 김두봉을 추대하였다. 또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 칭하고 중국공산당 지구에서 오랫동 안 활동해왔던 무정을 사령관으로 추 대하였다. 이후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장 족의 발전을 하였다. 화북의 북경 천 진 같은 대도시는 물론이고 황해 연안 의 중국 농촌지대, 장강(양자강) 이남 의 화중(華中), 나아가 멀리 북만주와 한반도 서울에 까지 조직이 건립되었다. 내실을 다지기 위해 화북 의 연안과 태항산 그리고 산동 및 화중 등지에는 조 선군사정치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청년들을 정치와 군사 능력을 겸비한 간부로 양성하였다. 1944년 중 호가장전투가 벌어진 마을 뒷산 전경(2017년 촬영, 독립기념관 제공) 1941년 12월 조선의용대가 주둔했던 호가장의 한 주택 건물(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