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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2024년 12월 Special Theme 정의부 창립 100주년 기념 특집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국내 진공’ 2대 최석순 참의장 시기가 전기에 해당하고, 제3대 윤세용 참의장 시기와 제4대 김승학 참의장 시기가 후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참의부 독립군의 ‘정병간군책’과 근거지 구축 참의부 독립군의 병력은 설립 시에 5개 중대의 군 인 500여 명과 100여 명의 경호원이 있는 상당한 실 력이 있는 부대로서, 무기의 5분의 1이상이 모젤 권 총이고 기타는 소총으로 무장되었다. 설립 초기부터 잦은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여 국경방면에서 발생 한 ‘무장투쟁’의 3분의 2를 담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병력 손실이 막대하였다. ‘고마령참변(古馬嶺慘變)’ 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설상가상격으로 1925년 6월 중 · 일간의 ‘미쓰야협정(三矢協定)’ 때문 에 참의부 독립군의 행동이 제한되고, 재정적 후원 의 결핍으로 참의부는 부득이 정병주의(精兵主義)를 내세워 이른바 ‘간군정책(簡軍政策)’을 선택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정병간군책은 윤세용(尹世茸) 참의장 시기부터 시 행되기 시작한 ‘자치’ 정책의 일환으로, 정규적인 독 립군의 수를 줄이고, 대신에 경호대와 재향군인단을 확대하는 방책이다. 이는 참의부가 처한 객관적 상 황과 장기적인 대일항쟁의 책략에서 나온 것이다. 장기간에 걸친 군사활동으로 참의부 산하 교민들의 사회경제생활은 보장받지 못했는데, 군자금· 의무금 에 대한 부담이 날로 커져 이것이 교민들이 참의부 를 이탈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참의부 설립초기 내외정세에 대한 판단이 정확치 못하여 단순한 군사활동으로 단시일 내에 일제 식민 통치를 뒤엎고 한국의 독립을 이룩하려 하였다. 하 지만 백광운·최석순 참의장 시기 동안 고마령참변과 미쓰야협정 후 중 · 일 합동단속으로 인해 이중 탄압 을 받는 가운데 점차 항일투쟁의 장기화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민의 자치를 통한 항일근거지 의 건설에 역점을 두고 ‘정병간군책(精兵簡軍策)’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종전의 단순한 유격 1934년 평양형무소 출옥 직후 기념 촬영한 김승학(필자 제공) 김승학 평전 『희산 김승학 한국독립 사 일대기』(말굽소리, 2022) 참의부에서 발표한 성명서(1929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