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page
36 2024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대한제국기 구국계몽운동의 재조명’ 우학회의 『서우』를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1910년 1 월까지 총 19권까지 발간되었다. 서북학회에서는 실 업에 관한 전문적 연구와 실업진흥에 앞장 선 상설 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실업부 신설을 계획하 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지속하는 가운데 일제는 1909 년 4월 10일 소위 ‘한일병합’ 단 행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이완 용 내각을 지지하던 이토 히로부 미[伊藤博文]가 한국통감에서 물 러났다. 일진회(一進會)의 이용 구는 대한협회, 서북학회 등과의 연합으로 이완용 내각을 사퇴시 키고 내각에 진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3파연합연설회를 개 최하고 대중의 호응을 얻고자 하 였다. 10월 26일 안중근에 의해 이토가 사살되자 일본에서는 ‘즉 각 병합’ 여론이 높아졌다. 그러 자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는 병 합을 서둘렀고, 대한협회는 회원 들이 대거 탈퇴함으로써 반대 의 사를 표시하였다. 한편, 서북학 회는 정치행동과는 상관없는 교 육단체라는 것을 계속 광고하였 다. 그러나 서북학회의 주도회원 들이 안중근 의거 관련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 결과 12월 3일 이른 바 ‘3파연합’은 실패하였 다. 이후 서북학회의 활동은 침 체되었고 『서북학회월보』도 1910년 1월 19호를 마 지막으로 발간하였다. 결국 1910년 9월 13일 한국 통감부의 정당해산령에 따라 서북학회는 활동을 중 단하였다. 오상규가 충북 옥천으로 낙향하여 거주하던 ‘괴정헌’의 최근 모습(머니투데이 제공) 애국계몽운동기의 교과서 중등산학(1907), 중국혼(1908), 경제교과서(1908). 출처 월간 대구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