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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2024년 7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기획 특집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현실 인식과 대응’ 중요했다. 그는 만주를 단군과 고구려로 이어지는 우리의 옛 땅으로 인식하고 그곳에 엄청난 의리적 명분을 부여하였다. 서간도에서 추진한 또 한 가지 사업은 무장 투쟁으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젊은 청년들에게 군사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다. 이 군사 교육은 1911년 6월 무렵 서간도 유하현 삼원 보(三源浦) 추가가(鄒家街)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11년 11월 18일 신흥강습소 총 회가 개최되자 이 자리에 이상룡도 참석하였다. 그 는 교회(校會)에서 직책을 연임하게 되자 학교 곁으 로 거처를 옮겼다. 신흥강습소는 신민회 계열의 인 사들이 국권 상실 직후 서간도로 이주하여, 독립군 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활동과 좌우 통합 추진 이상룡은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되었지만, 결국 실패로 귀결되자 그 원인을 이렇게 분석하였다. 그는 3·1운동 실패의 원인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내적 역량이 충 분하지 못했고, 둘째는 시기를 잘못 판단했다고 보 았다. 그가 보기에 내적 역량에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으니 하나는 인재 교육과 훈련이요, 둘은 금 전의 저축이었다. 시기에도 두 가지를 짚어볼 수 있 으니, 우리가 돕는 시기와 저들의 형세를 틈타는 시 기였다. “오늘날 우리 내적 역량에 과연 쓸만한 인재 가 있습니까, 아니면 쓸만한 재정이 있습니까? 시기 라는 것도 과연 그것이 우리가 돕는 때였습니까, 아 니면 저들의 형세를 틈탄 시기였습니까?” 이상룡은 무장 투쟁 노선을 취하면서 필요한 것이 인재와 재 정, 그리고 시기를 중요한 요소로 들었다. 이 세 가지 는 전쟁을 하기 전에 반드시 점검해야 하는 항목들 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익계의 이승만을 대통령으 로, 좌익계의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한 좌우 합작 정 임시정부 국무령 시절의 이상룡(국가보훈부 제공)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이상룡과 부인 김우락(2019년 건국훈장 애 족장)의 묘(안동시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