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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2024년 4월 Special Theme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5주년 특집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움직인 지도자들’ 실패하고, 양기탁과 안창호는 취임을 사양하고, 홍 진은 민족대당 조직을 주장하며 사퇴했다. 이러한 위기는 1926년 12월 김구가 국무령으로 선임되면서 극복되었다. 이제 행정수반으로 위상이 올라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임 시정부의 정상화가 무엇보다 급했기 때문이다. 그래 서 그는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를 부흥하기 위해 집 단지도체제로의 개헌을 주도하였다. 1927년 4월 헌 법을 개정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 원제로 바꿨다. 일제는 1931년 ‘9 · 18만주사변’을 도발하여 재만 (在滿)동포들이 거주하던 만주 땅을 유린하기 시작했 다. 이렇게 되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비상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방향은 임 시정부 직속의 특무조직을 설치해 의열투쟁을 전개 하고, 그 책임은 ‘위기의 지도자’ 김구가 맡는 것으로 정해졌다. 국무회의 결정에 따라 김구는 의열투쟁을 전개할 특무조직으로 1931년 11월 한인애국단을 결성했다. 한인애국단의 단원은 80명 정도로 이들 중 10여 명 의 핵심 단원들이 그의 지휘 아래 여러 차례 의열투 쟁을 벌였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일왕 저격 의거와 4월 29일 윤봉길의 홍구(虹口)공원 의거가 대 표적이다. 특히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는 만주와 상해 점령으 로 기고만장하던 일제의 침략 기세를 꺾어버리고,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재차 각인시킨 쾌거였다. 만보산사건으로 야기된 한 · 중 양 국민의 불신과 갈등을 일거에 날려 버린 효과도 컸다. 이로 써 한중 항일 연대투쟁의 계기를 마련하고, 임시정 부는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부활한 것이다. 위 기의 지도자 김구가 해낸 일이다. 장정시기 임시정부를 수호하다 윤봉길 의거 직후 김구는 미국인 피치(G. A. Fitch) 목사의 집에 은신하다가 상해와 항주 (杭州) 사이의 작은 마을 가흥(嘉興)으로 피신했다. 절강성 가흥에 는 한국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중국인 저보성(褚 補成) 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도 1932년 5월 긴급히 항주로 피신했다. 임시정부의 항주시기가 시작된 것 이다. 항주에 머물던 임시정부는 중국의 수도 남경 방향으로 이동하여 1935년 11월 진강(鎭江)에 자리 잡았다. 임시정부의 진강시기가 열린 것이다.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독립운동세력은 민족전선 통일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여 한중 항일 연대투쟁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좌우 독립운동세력은 1932년 11월 상해에 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 여기에는 좌우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가 참가하였다. 이를 기반 으로 1935년 7월 남경에서 ‘민족대당’으로 민족혁명 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를 해소하려 하였다. 이같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임시정부의 지킴이 김 구가 다시 나섰다. 그는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 고 임시정부를 고수하던 인물들을 한데 모았다. 임 시정부를 지키고 유지하는 독립운동 정당이자 여당 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수호세력은 1935년 11월 가흥 남호(南湖)의 배 위에서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고 국무위원을 선출함 으로써 무정부 상태를 수습했다. 나아가 민족혁명당 에 대항하는 임시정부의 수호 정당으로 한국국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