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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2023년 6월 Special Theme ‘의병의 날’ 13주년 기념 특집 한말 의병전쟁을 다시 본다 의병들에게 ‘내란죄’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강도죄 · 폭 동죄’의 비중은 점차 증가하는 양 상이 나타났다. 일제 당국은 의병 이 봉기하는 상황을 정치적 사안 이 아니라, ‘폭도들’이 준동하는 치 안유지 필요 상황으로 인식했고, 그 결과 1907년 하반기를 기점으 로 적용법리의 양상이 변화하고 있었다. 일제측의 재판을 통한 의 병 탄압은 폭압적이고 ‘정당성’ 없 는 식민지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3도창의군의 결성과 서울진공작전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사건을 이유로 일제는 고종(광무황제)을 강 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요하면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 시켰다. 군대 해산 이후 각 지역에서 항쟁하던 의병은 급속도로 증가하 였다. 특히 각 지역에 분산되어 항쟁하던 의병들은 해산군인이 합류하 면서 주변의 의진(義陣, 의병부대)과 연합하는 차원을 넘어 각 도(道)의 경계를 넘어서 의병부대간의 연합과 연계를 추진하였다. 평안 · 황해 · 경 기 · 강원 · 충북 등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연합항쟁 을 시도하였다. 관동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은 전국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 집하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이후 전국적 규모의 연합의진으로 발전하기 위해 주둔지를 원주에서 경기도 지평으로 이동하였다. 이인 영 의진은 지평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서울진공작전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각지에서 16개 의진 약 8,000명이 합류해 세 력이 강화되었다. 이인영은 13도창의군을 이끌면서 일본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방법은 서울진공작전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1907년 11월 본거지를 경기도 양주로 이동하여 의진을 강화하였다. 허위(許蔿) 의병부대는 이때 관동창의군 에 합류하였고, 전국 각지의 의 진들이 양주로 모여들어 48개 의진 1만명 규모가 되었다. 결 국 강원도를 기반으로 하는 이 인영 계열 등과 경기도와 황해 도를 중심으로 한 허위 계열 의 진(박정빈 · 김준수 · 연기우 등), 그리고 충청도를 활동무대로 하던 이강년(李康秊) 부대 등이 중심이 13도 창의대진소(이하 13도 창의군)를 구성하게 된다. 이인영 의병장(1867~1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