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page

36 2023년 5월 Special Theme  독립운동사 연구교육의 현황과 과제 독립운동사 연구 · 교육 강화해야 위사건과 김구 암살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취를 감췄 다. 더욱이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를 등에 업은 반공 주의에 독립운동 가치는 퇴색되고 말았다. 그 뒤 1960년대 4 · 19혁명에 민족주의가 분출하 고, 한일회담을 전후로 일어난 민족적 충격에 한국 독립운동연구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조지훈의 『한 국민족운동사』(1964)를 필두로 『한국독립운동사』 1~5(국사편찬위원회, 1965~1969),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5(김준엽ㆍ김창순, 1967~1976), 『독립운 동사』 1~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8) 등 이 편찬되면서 이를 고무시켰다. 이에 참여했던 연 구자들은 독립운동사연구 1세대로 성장했는데, 조 동걸 · 윤병석 · 박영석 · 이현희 · 박용옥 · 김창수 · 박성수 등이다. 이들이 1970년대 대학교수로 부임하면서 한국근대사·한국독립운동사 전공 후학들을 길러냈 다. 하지만 이는 전공과목에만 해당하였다. 한국독립운동사 과목 선택의 기회가 별로 없어 1970년대는 졸업학점을 160학점에서 140학점으 로 축소하고 교육의 내적 충실을 기하며 계열별 모 집을 골자로 하는 실험대학이 추진되었다. 교양과목은 전체 과목에서 30%로 규정하여 교양교육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교양과목 대부분은 국민윤리 · 교련 · 한국사·체육 등 ‘국 책과목’과 체육 · 국어 · 외국어 등으로 채워졌 고, 반드시 특정 학년, 학기에 수강해야만 했 기에 학생의 자율권이 배제되었다. 이에 한 국독립운동사를 포함한 다양한 과목을 선택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한국사는 일제 강점기까지가 범위였지만, 고대사만 맴돌다 강의가 끝나는 수박 겉핥기식 교육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1980년대에는 ‘교육 정상화’ 방침에 따라 교양과 목과 전공과목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필수와 선택과 목으로 구분하였다. 이에 교양과목이 양적으로 늘어 난 측면도 있었는데, 주로 ‘개론’ 혹은 ‘개설서’가 주를 이뤘고 교양과목의 선택권이 개별 학과에 주어져 타 과생들에게는 다양한 수강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구조 속에서 교양과목을 전담하는 기구가 폐지 되어 교양교육이 오히려 후퇴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때에도 교양 필수과목으로 한국사가 개설되었지 만, 한국독립운동사가 외면받기는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당시는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급 부상하면서 국민 누구나가 한국독립운동사에 주목 하던 시기였고, 대학 내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민주 화운동에 힘입어 한국독립운동사가 주목받아 이를 활성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민주화운동에 사 회주의 독립운동 논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1987년 8월 독립기념관이 개관하면서 2세대 독립운 독립기념관의 ‘국외 한인사회와 3 · 1운동’ 국제학술회의(201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