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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2023년 3월 Special Theme   국민대표회의 100주년! 민족운동 세력의 통합과 혁신을 도모하다  개조파는 국민대표회의에서 우리  독립운동을 ‘①세계 피압박 민족 의 해방운동과 동일전선이 되도록  결정’, ‘②혈전에 중점을 두고 조직 적으로 추진해 가기로 결정’하고,  ‘③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 · 방 법 · 헌법 · 제도 · 정책 및 기타 일체 를 실재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선할  것을 결의한다’ 라는 3개항의 개조 안을 제출했다. 이 가운데 개조론 의 핵심 내용은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헌법을 개정하여 임시정부를  개조한다는 세번째 항이었다. 개조파와 개조론의 등장 1921년 2월 박은식 등 15명은 ‘전 국민의 의사에 의한 통일적 강고한  정부조직’과 ‘독립운동의 최량의 방침 수립’을 위해 국민대표회 소집을  요구하는 ‘우리 동포에 고함’을 선언했다. 4월에는 중국 베이징(北京)에 서 박용만 등이 군사통일회의를 열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의 해체와 신기관의 건설을 결의하고 이를 임시정부에 통 보했다. 5월에는 서로군정서와 한족회를 중심으로 이른바 ‘액목현회의’ 를 열고 임시정부 개조와 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탄핵 을 결의했다. 상하이에서도 안창호 · 여운형 등이 국민대표회 소집을 요 구하는 연설회를 열었다. 이후 국민대표회 소집 요구는 중국 관내를 넘 어 서북간도, 국내, 미주 등지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여기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가졌던 인적 · 지역적 제한성뿐만 아 니라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의 한계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있었다.  박은식 등은 국민대표회 소집 이유로 ‘처음 임시정부를 조직할 때 소수 가 마음대로 각 방면의 여러 의견을 구하지 않고 신시대 신건설에 적합 하지 않는 계급과 방만한 제도를 설정’한 때문이라 했다. 안창호 역시 정 ➊  1921년 5월 12일 안창호 · 여운형 등이 상하이에서 개최한 연설회 기사(『독립신문』, 1921.5.14) ➋  40대 시기의 안창호 제공) ➋ 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