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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35 평양에서 시작된 물산 장려 운동은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민족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민 족 기업 등의 설립도 활발해졌지만 일제의 간섭 및 탄압으로 물산 장려 운동은 큰 성과를 보지 못한 채 점차 사라졌다. 민족의 힘으로 대학을 세우자 |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일제의 식민지 우민화 교육이 이루어지자 이에 맞서 고등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자는 움직임 이 일었다. 마침 일제는 우리 땅에 일본인 자녀를 위한 경성 제국 대학(서울대학교 전신)을 설립한 터였다. 이 에 우리 민족의 힘으로 대학을 세우자는 민립 대학 설 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2년 민립 대학 기성회를 조 직하고 대학 설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일제의 심한 수탈로 인한 모금 저조와 일제의 탄압으 로 모금 운동은 실패하였다. 다함께 가르치자! 배우자! | 문맹 퇴치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실패 이후 문맹을 해결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 교육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문맹률은 90%에 달하였다. 이에 전개된 운동이 1929 년 조선일보가 전개한 문자 보급 운동과 1931년 동아일보가 전개한 브나로드 운동이다. 브나로드(v narod)는 러시아 말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으로 원래 러시아에서 시작된 농민 계몽 운동이다. 학생 계몽대를 조직하여 농민을 대상으로 한글 보급에 나서 많은 참여를 이끌었으나 1935년 조선총독부 에 의해 중단되었다. 식민 교육에 반대한 학생들의 외침 | 6.10 만세 운동 1926년 6월 10일 거리에 긴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 이 날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장례 일이었다. 장례 행렬 뒤로 학생들의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학생들은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한손으로 태극기를 흔들고 다른 손으로 격문을 뿌렸다. 순종의 장례 행렬을 보기 위하여 모여 있던 수많은 군중들이 동참하면서 대규모 만세 시위로 번졌다. 민중의 호응이 커지면서 만세 시위는 곧 전 국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미리 계획을 감지한 일제의 무장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제지당하여 만 브나로드 운동 관련 신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