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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해방 전후 시기 조선독립동맹 · 조선의용군의 귀환과 동향 35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중국공 산당 지구에서 활동했던 한국 독립운 동가들은 화북의 한국 동포들을 흡수 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의 수도인 섬서 성 연안에서 1941년 1월 화북조선 청년연합회(회장은 무정)를 결성하 였다. 김원봉이 주도해서 1938년 10 월 호북성 무한에서 창설한 조선의용 대 주력은 1941년 초 황하를 건넜는 데, 특히 같은 해 6월에는 화북 팔로 군 작전지역인 태항산(太行山)으로  이동하였다. 그 부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불렸다. 1942년 7월 태 항산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화북 조선청년연합회를 확대해 화북조선 독립동맹을 결성하였다. 또 조선의용 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였다.  대규모로 성장한 조선의용군 후신부 대들은 1949년 여름에서 1950년 봄  사이에 북한으로 들어왔고, 6 · 25전 쟁 개전 초부터 북한 인민군의 일원 으로 38선 이남으로 밀고 내려오기 도 했다.  조선독립동맹의 결성(1942.7 화북 태항산) 중일전쟁 발발(1937.7) 후 한반도의 한국인들이 대거 중국 화북(華 北)으로 이동하였다. 북경(北京) · 천진(天津) · 태원(太原) · 제남(濟南) 등 대 도시는 물론이고 농촌지대로도 몰려들었다. 화북으로 간 한국인 가운 데는 행상도 있었고 매소부(賣笑婦, 유흥업 종사자) 또는 일본군 지원병 도 있었으며, 농사짓는 농민도 그리고 사업가도 있었다. 1945년 8 · 15 당시 화북의 한국인은 30여 만명에 달하였다. 동포들의 화북으로의 대 량 이주는 재중국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중국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독립당의 김구는 1940년에 들어와 휘하의 청년들을 화북에 파견하여 한국광복군을 창설, 발전시 키려 한 바 있었다. 중국공산당 지구에서 활동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 은 화북의 한국 동포들을 흡수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의 수도인 섬서성 (陝西省) 연안(延安)에서 1941년 1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회장은 무정) 를 결성하였다. 한편 김원봉이 주도해서 1938년 10월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에 서 창설한 조선의용대 역시 화북으로 몰려오는 조선인들에게 큰 희망 을 가졌다. 1940년 10월 중국의 전시 수도 중경(重慶)에서 개최된 조선 의용대 확대간부회의에서는 조선의용대의 화북 파견을 결정하였다. 결 창설 직후의 조선의용대(1938.10, 호북성 무한,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