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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연합작전 성과 35 국 군대와 연합작전을 적극 추진하였다. 임시정부는 12월 10일 일본에 대해 「대일선전성명서(對日宣戰 聖明書)」를 발표하는 등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연합 국으로부터 교전단체 승인을 받기 위해 독립외교활 동에도 적극 나섰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1941년 6월 ‘주미외교위원부’를 미국의 워싱턴 D.C에 설치 하는 것을 승인하고, 이승만을 위원 장으로 임명하여 대미외교를 담당하 게 하였다. 태평양전쟁 발발로 제2차세계대전 이 확대되면서 국제적으로 임시정부 와 광복군의 전략적 가치가 부각됨에 따라 광복군은 중국에 이어 영국, 미 국의 군대와도 각각 연합작전을 추진 하였다. 일본군이 1942년 말레이반 도를 거쳐 버마 전 지역을 점령하자 영국군과 중국군은 인도와 중국 국경 부근으로 철수하였다. 연합군은 ‘버 마탈환작전’을 계획하고 광복군에 연 합작전을 제안함에 따라 광복군은 제1, 2지대에서 적임자 9명을 선발 하여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 隊, Korea National Army Liaison Unit)’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인도 주 둔 영국군의 동남아전구사령부에 소 속되어 3개월간 필수 교육을 받은 후 1944년 초 영국군 제201부대와 함께 최전선인 임팔(Imphal) 전선에 투입 되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 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2017, 160쪽). 광복군 대원들은 일본군에 대한 대적방송, 적문서 번역, 전단 작성, 포로신문 등 대적선전공작 활동을 전개하여 1945년 5월 영국군·중국군·미국 군과 함께 연합군의 버마 탈환작전에 크게 기여하 였다. 7월에는 일본군을 완전히 패퇴시켰다. 이로써 광복군의 활동범위가 인도와 버마 전선으로 확대되 ‘김구와 장개석 회담’ 내용 중국측 기록 문서(출처: 「총재접견한국영수회담기요 (1943.7.26)」,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백범김구전집』 5권, 251~252쪽) ‘카이로 정상회담’에서 미·영·중 정상들과 쑹메이링 장제스 부인(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