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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석주 이상룡의 현실인식과 독립운동 방략의 변화 35 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안동의 유림들 가운데는 단식 과 자결 순국 사례가 잇달았다. 이러한 가운데 이상 룡은 만주(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 었다. 그의 이러한 고민은 만주 망명 계획으로 이어 졌고, 이 고민은 1910년 주진수(朱鎭洙)를 통해 신민 회의 계획을 듣고 나서 처남 김대락과 함께 망명 계 획을 세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룡은 망명길에 나서면서 그 까닭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내가 무엇 때문에 문전옥답(門前沃畓)과 가택을 헌신짝처럼 버 리고 궁벽하고 황폐한 만주 땅으로 가려고 하는가? 작년 가을에 나라의 일이 그릇되었다. 이 7척 단신을 돌아보니 다시 도모할 만한 일이 없는 데, 아직 결행 하지 못한 것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일 뿐이다. “어떤 경우에든 바른 길을 택한다”는 것은 우리 유가에서 외다시피 해 온 말이다. 마음에 연연한 바가 있었던 것이 아니며, 두려운 바가 있어서 결행하지 못한 것 도 아니다. 다만 대장부의 철석같은 의지로써 정녕 백번 꺾이더라도 굽히지 않는 태도가 필요할 뿐이 다.” 그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과 많은 토지와 재 산을 정리하고, 가족, 친지들을 이끌고 1911년 1월 5일 망명길에 나섰다. 만주에서 이상룡의 활동은 첫째, 동포 사회 의 사 회적,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자치조직을 운영하 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경학사(耕學社)의 경영으 로 나타났고, 후일 부민단(扶民團)과 한족회(韓族會) 로 계승되었다. 이들 단체는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 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둘째는 독립 전쟁을 수 행할 군사력을 양성하는 군사 교육을 실행하는 것이 었다. 이를 위해 신흥강습소를 비롯한 많은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였다. 신흥강습소는 후일 신흥무관학 교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 학교는 청년들에게 보 다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시키는 곳이었다. 이를 위 하여 이상룡은 대사탄 · 대두자농장, 마록구농장(馬鹿 溝農庄), 길남장(吉南庄)과 같은 병영을 운영하였다. 서간도에서 이상룡은 동포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당시 이상룡에게 만주는 낯선 민족, 생소한 풍속, 인자함이나 따뜻함을 불허(不許) 하는 허허벌판의 매서운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그 런 척박한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서 그는 이주한 망 명객의 입장에서 그것이 지니는 의미와 명분이 더욱 1910년대 서간도 지역의 대표적 한인 자치기구인 부민단의 본부 터 (길림성 통화현 광화진 고려관자, 독립기념관 제공) 광화진에 위치한 신흥무관학교 터 추정지(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