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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5년 2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2 · 8독립선언을 다시 본다’ 오히려 명예로운 일입니다”라는 어떤 조선인 학생의 말이 인용되었다. 이날 체포된 이는 총 27명이고 이광수를 제외한 10명이 2월 10일 검찰에 기소되었다. 이광수는 선 언서 집필 완료 후, 상하이로 가서 도쿄유학생의 독 립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라는 최팔용의 지시를 받 고 1월 30일 고베를 출발함으로써 검속을 피했던 것 이다. 기소된 10인 중 최근우는 인쇄물 제작 당시 조 선에 가있던 것이 확인되어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최종적으로 기소된 9인의 대표들은 즉일 공판에 회 부되어 1919년 2월 15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판결 이 이루어졌다. 2 · 8독립운동 주역의 재판 소식은 국 내에서 『매일신보』 1919년 2월 17일자에 간략히 보 도되었을 뿐이다. 제1심에 불복한 9인의 2 · 8독립운 동의 대표는 항소했는데 3월 21일 제2심에서 최팔 용이 금고 1년형에서 금고 9개월형으로 변경된 것을 제외하고 모두 항소 기각 당했다, 이에 불복하여 다 시 상고했으나 1919년 6월 26일에 결국 상고 가 기 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2 · 8학생독립운동의 의미 역사적 사건은 당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 그 사건이 일어난 후에 어떻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계승되는가를 통해 그 역사적 의미가 결정된 다. 2 · 8독립운동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 당 일의 시위는 행사 도중 일경에 제지당하고 주도세력 이 피체됨으로써 미수에 그친 모양새가 되었다. 그 러나 2 · 8독립운동은 그 날의 사건으로만 박제(剝製) 되지 않았다. 당장 구속을 면한 학생들은 2월 12일 히비야공원에서 제2차 시위운동을 결행하여, 변희 용 · 최재우 · 강종섭 · 최승만 · 장인환이 구속되는 사태 도 일어났다. 유학생들은 대거 일본을 떠나 조선으 로 귀국했다. 일제 측 자료에 의하면 2월 8일부터 5 월 15일까지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국한 조선인 총수 36년 만의 도쿄지역 큰 눈 소식을 보도한 『지지신보[時事新報]』1919년 2월 9일자 기사(왼쪽)와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600명의 유학생 등 이  참여한 2 · 8독립운동 소식을 보도한 같은 날짜 기사(오른쪽, 이상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