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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5년 1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독립운동의 목표와 방법론 재조명’ 쟁을 수행하자는 쪽으로 노선을 전환하였다. 이른바 독립군 기지 개척이 시작된 것이었다. 무형국가(임시정부) 건설 주창 1909년 2월 공립협회는 하와이 한인단체인 한인 합성협회와 통합하여 국민회를 창립하였다. 국민회 는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 창간호를 통해 “국 민이란 두 글자는 다만 나라 백성을 부르는 칭호가 아니라 그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국민 주권주 의를 선언하였다. 이어 공립협회에서 추진한 통일연 합기관 설립을 승계하였다. 그 결과, 국내의 신민회 를 비롯하여 북미, 하와이, 멕시코는 물론 러시아, 만 주 일대까지 통일연합기관을 설치하였다. 국민회는 1910년 대한인국민회(이하 국민회)로 개칭하면서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임을 선포하였다. 그해 8월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자, 국민회는 곧 바로 “우리는 (중략) 대한 민족의 단체를 공고히 하 며 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公 法)에 상당한 가정부(假政府)를 설시함이 목하(目下) 에 급무라”고 선언하면서 국민주의에 입각한 임시정 부 수립을 제창하였다. 임시정부 수립 여론을 위해 초빙된 인물은 바로 박용만(朴容萬)이었다. 박용만은 1911년 취임 직후 부터 해외 한인의 통일기관이자 자치기관인 중앙총 회를 설립하여 이를 임시정부로 전환하자고 여론을 선도하였다. 이른바 ‘무형국가(無形國家)’론이다. 박 용만은 “원래 국가의 성립은 백성과 토지로 기초를 삼고 법률과 정치로 집을 만드는 것이라. 그러하나 시방(時方) 우리는 백성은 있고 토지는 없어 불가불 남의 토지 위에서 집을 지을 수밖에 없는 고로 무형 미주지역의 대표적 무장투쟁론자 박용만(독립기념관 제공) 1912년 간행된 대한인국민회 헌장 표지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