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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4년 11월 Special Theme  11 · 3(광주)학생독립운동 제95주년 특집 ‘11 · 3(광주)학생독립운동을 다시 본다’  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민족독립’, ‘민족해방’의 구호 로 발전해갔다. 11월 전남의 일부 학교에서 그 단초 를 보였던 ‘민족독립’, ‘민족해방’은 12월 서울과 주 요 도시 중등학생들의 시위운동을 거쳐 1930년 1월 에는 전국적인 시위과정에서 주요한 구호로 자리잡 았다. 2월에 들면 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운동에서도 ‘민족독립’, ‘민족해방’의 구호가 일반화되었다. 그러 면서 학생운동의 차원을 넘어 독립운동, 민족해방운 동으로 발전해 갔다. 1929년 11 월부 터 1930년 3월까지 국내외에서 최소 한 280여 개 이상의 학교와 5만 4천 여 명 이상의 학생들이 이 운동에 참 여하였다. 11 · 3학생독립운동의 국외 파급과 의의 국내의 학생운동은 국외로 파급되 면서 각지의 민족운동 세력에 의해 새로운 운동력으로 전환되었다. 중국 관내(關內)에서는 국내의 학생운동 이 중국내 한인사회가 결속할 수 있 는 공통의 계기로 작용하면서 민족유 일당 운동이 재추진되기도 했다. 만 주(중국 동북지방)에서는 국내의 학 생운동을 계기로 사회주의 세력을 중 심으로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이 모색 되었다. 북간도(중국 연변) 지역의 한 인사회에서는 학생들이 직접 시위에 나섰을 뿐 아니라, 3 · 1절을 맞아 일 반인과 학생의 대규모 연합시위운동이 추진되었다. 11 · 3학생독립운동은 미주의 한인사회에도 큰 영향 을 끼쳤다. 학생운동의 지원을 목적으로 각지에 공 동회가 조직되면서 한인 사회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미주 본토와 하와이의 한인 사회가 1920년대 후반 의 침체를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는 모두 11 · 3학생독립운동에 의해 촉발 된 민족운동의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11 · 3학생독립운동은 학생이 주체가 되어 계획, 추 일제의 보도통제 해제 후 ‘광주학생사건’과 서울시위 보도기사(동아일보,  1929.12.28 호외) 1929년 12월 서울 시내 각 학교의 시위운동을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한국학중앙 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