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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4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특집 ‘대한제국기 구국계몽운동의 재조명’ 연의 개최를 들 수 있다. 통상회, 특별총회, 각 지역 과 각 학교에서의 운동회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준 · 이동휘 · 이종호 · 정진홍 · 설태희 등이 대표적인 강 연자였다. 세번째는 청년운동을 위해 서북학생친목 회를 두었다. 1907년 3월 17일 서우학회(西友學會) 와 함께 조직하였다. 학리 토론과 지식 교환을 통하 여 학리를 연구하고 지식을 개척하여 국가의 정간이 되고 인민의 표준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다. 회원은 서울에 거주하는 관서·관북지역 학생들과 청년들이었다. 친목회 활동은 주로 강연회, 토론회, 운동회 등이었다. 토론회는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매달 일요일 오후 1시 친목회 사무실인 한북학교에 서 개최하였다. 강연회와 운동회는 비정기적으로 개 최하였고 연사를 초빙하여 진행하였다. 1907년 12 월 8일에는 안창호가 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회를 개 최하였다. 네번째는 국채보상운동을 추진하였다. 1907년 4 월 오상규, 이준, 양효건 등 36인이 국채보상취지서 를 발표하고 함경도 각군에서 의 연금 을 모집하였다. 이외에 한북흥학회는 의병장 최익현(崔益鉉)이 순국하자 의 연금모집 전개운동, 이용익의 죽음과 이준의 파면에 대한 사후대책을 세우 기도 하였다. 한북흥학회와 서우학회를 통합하여 서북학회 설립에 나서다 한북흥학회는 서우학회와 통합하 여 서북학회를 설립하였다. 한북흥학 회의 회장이었던 이준 대신 전 회장 이었던 오상규 중심으로 통합이 이루어진 것 같다. 이준은 고종의 특사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 해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 갔으나 돌아오지 못 하였다. 이준의 비보에 이어 1907년 7월 20일 고종(광무 황제)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24일 3차 한일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으로 대한제국 군대는 해산되었다. 이와 같은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서북 학회 준비회가 개최되었다. 서북학회 준비회는 149 명이 모인 가운데 임시의장 이동휘의 주도로 진행되 었다. 1월 11일 수백 명의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학회의 통합을 알리기 위한 개회식이 거행되었다. 서북학회는 설립 취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 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된 것은 실력양성의 부 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단합하여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이를 위해 가장 효과적 인 것은 단체와 단체의 단합이라고 강조하였다. 나 아가 국민 전체가 단합되는 날 국권 회복과 근대적 1898년 3월 서울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광경(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