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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4년 9월 Special Theme 한국광복군 창설 제84주년 특집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의 합동작전’ 와 책임을 김구에게 일임했다. 이리하여 1931년 11 월 임시정부의 비밀결사 ‘한인애국단’이 결성되었 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홍커우공원의 거’로 상하이 파견 일본군총사령관, 상하이총영사 등 군부 및 정부 수뇌 7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이 의거는 붕괴된 한국과 중국 양 민족 간의 연대를 다 시 회복하고, 중국 영토안에서 독립운동을 재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그리고 한민족의 독립운 동이 매우 완강하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했으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을 침체에서 부활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반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중국 관내로의 확전을 단념하고 중국측과 긴급히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등 정치·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에 감동을 받은 장제스(蔣介石) 중국 총통은 김구의 요청을 수용하여 1934년 11월 부터 한국 청년들이 뤄양( 洛陽) 의 중국 중앙군관학교 한인특설 반에서 교육훈련을 받을 수 있도 록 하였고, 이후 난징(南京) 중국 군관학교에 ‘한인특무대독립군 과정’을 신설하는 데 협조하였 다. 이들 과정을 수료한 한인 군 관들은 후에 한국광복군 창설과 연합군과의 연합작전을 수행하 는 주력으로 참여하였다.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한·중, 한· 영, 한·미 연합작전 수행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 서 임시정부 내에서는 ‘독립외교노선’보다 ‘독립전 쟁노선’이 더욱 우세해졌다. 임시정부는 광복군 창 설에 대해 중국 정부와 교섭을 진행하였다. 1940년 5월 중국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한국광복군 편련계 획대강」을 중국 측에 전달했는데, 그 요지는 한국광 복군을 편성하여 중·한연합군으로 중국군과 연합작 전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중간 광복군 지휘관계 설정문제가 타결되지 않아 협상이 교착상 태에 빠지자 임시정부는 단독으로 광복군 창설을 추 진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 (重慶)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이하 ‘광복군총사 령부’)를 창설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일제가 미국의 진주만기지를 공 격하여 미국과 일본 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제 2차세계대전이 확대되자 임시정부는 이때가 ‘독립 전쟁의 적기’라고 판단하고, 중국·영국·미국 등 강대 인도 임팔(Imphal) 전선에 투입된 광복군 공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