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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4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기획특집 ‘한국독립운동과 백두산’ 街)에는 1911년 이상룡·이회영·이동녕·이시영 등이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를 경영할 경학사(耕學社)를 세 우고 민족교육을 담당할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경 학사는 후일 부민단, 한족회와 같은 강력한 항일단 체로 성장했으며, 신흥강습소에서는 청장년을 대상 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신흥강습소는 통화현 합 니하(哈泥河)로 이전한 1912년에는 신흥학교로 확장 하고 구국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역사와 지리 과목에 는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 뿐만 아니라 만주를 단 군조선의 옛 강역으로 기술한 이상룡의 『대동역사 (大東歷史)』가 교재로 사용되었다. 단군 혈통이 북부 여에서 동부여, 고구려로 3천년간 연면히 이어졌으 며,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높이 평가하였다. 민족 발달의 지리적 중심을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남북만 주에 둔 셈이다. 신흥학교는 흉작과 어려 운 재정여건, 마적들과의 충돌 속에도 꾸준히 성장하 였다. 졸업생들은 교사 외 에 부민단 등 한인단체에서 활동하였고, 일부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교관으 로 초빙되어 가기도 했다. 신흥학교는 신흥무관학교 로 확대 개편되었다. 1919 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밀 려오는 수많은 청년들을 수 용하기 위하여 사방에 분교 까지 두어 3·1운동 때까지 약 1천명의 독립군을 양성 하여 만주 독립군 항쟁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근대에 들어 백두산은 민족의 발상지이자 영산으 로 자리매김되어 한민족의 구체적 상징이 되었다. 이 과정에 민족주의 운동가들이 단군이 백두산에서 발상해 남북으로 역사를 전개해나간 것으로 한국사 를 그려냄으로써 옛 영토였던 서북간도에서의 독립 운동 기지 건설과 그 전개는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 게 되었다. 19세기부터 시작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넌 이주의 역사, 민족주의 역사가들의 단군 백두 산 발상 및 북방중심의 역사관 구축, 마지막으로 서 북간도에서의 독립운동 기지 구축과 전개는 상호 배 경이 되고 영향을 주어 한국민족주의와 한국독립운 동의 의미와 성격을 규정하였다. 곧 한국 독립운동 은 이주 한인, 간도문제, 백두산 문제와 밀접한 관련 을 갖는 저항성과 국수성(國粹性)을 지니게 되었다고 「불령단관계잡건 재만주 29책, “불령선인(不逞鮮人) 분포 일람(一覽) 송부(送付)의 건”」 (1921.8.6.). 평안북도 경무당국이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족회 등의 79개 독립운동 단체와  686명의 독립운동가 명단. 그리고 각각 단장과 단원을 구분해 표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