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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4년 7월 Special Theme 광복 제79주년 기획 특집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현실 인식과 대응’ 었다. 하지만 의병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 정 규군을 이길 수 없었다. 의병을 지원했던 이상룡 에게 보다 중요했던 것은 유가의 정신인 ‘사생취 의(捨生取義)’의 도리로 국혼을 지켜야 한다는 유 가 본연의 자세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에게는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에서 그가 찾아낸 것은 바로 서양 학문이었고, 백성 (民)이었다. 이제 이상룡의 공부는 유학에서 서학으 로, 그리고 그것을 나눌 대상도 선비에서 백성(民)으 로 옮겨 갔다. 그는 서구 사상에서 국가를 만인의 약 속, 즉 계약에 의해 성립된다는 사회계약론을 수용 하였다. 이처럼 서구 근대 사상을 수용한 이상룡은 많은 사람이 모여 만든 단체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믿음은 대한협회 활동으로 나타났다. 이상룡은 대한협회 안동지회장에 취임하 여 이러한 운동을 주도하며 민족 교육에 힘썼다 . 비 슷한 시기에 그는 안동 최초의 근대학교였던 협동 (協東)학교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 라, 유인식, 김동삼 등 협동학교 설립의 주역들과 긴 밀하게 소통하였다. 이런 연유로 협동학교는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국권 상실 이후 만주 망명과 무장 투쟁 노선으로 전환 1910년 8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고 나라가 망했 김흥락의 문집인 『서산집』 표지(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 제공) 이상룡이 안동지회장을 맡은 대한협회의 기관지 『대한협회 회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고성 이씨 종가이자 이상룡의 생가인 안동시 임청각의 군자정(경북 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