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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4년 4월 Special Theme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5주년 특집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움직인 지도자들’  병부대 참여와 치하포 의거로 분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살인죄로 사형을 받고 혹독한 옥고를 치렀지 만, 이때에도 좌절하거나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투 옥 중에도 『태서신사(泰西新史, 서양역사)』, 『세계지 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며 서양이란 무엇이고 세 계형편이 어떤가를 파악하며 조국에 대해 성찰하였 던 것이다. 광무황제(고종)의 특사로 사형 집행이 면제된 뒤 에는 삼남지방을 여행하며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보 고 계몽운동을 생각했다. 그래서 자유 평등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기독교에 귀의한 뒤 민중계몽을 위 해 민족교육운동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조국의 운 명은 나날이 기울어져 갔고, 결국 을사늑약으로 국 권의 일부를 일제에게 빼앗기는 상황이 도래했다 . 그는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용감하게 나섰다. 한 편으로는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 으로는 혁명적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그 래서 국권회복과 공화주의를 표방한 신민회의 정치 사회 변혁운동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안악 사건’과 ‘신민회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한 번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에도 김구는 밤새워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 던 일본인 간수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애국심을 키 웠고, 앞으로의 독립투쟁에 대비하여 의병과 활빈당 출신의 옥방 동료로부터 ‘참수 기술’을 터득했던 것 이다.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다 김구의 인생은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 부에 참여하면서 크게 바뀌었다. 3 · 1운동이 일어나 자 김구는 폭발하는 민족대중의 자주독립의 열기에 상해 홍구공원 거사 전 윤봉길 의사와 기념촬영한 김구(독 립기념관 제공) 1938년 5월 일제의 밀정 이운환의 총격(남목청사건)으로 피 격당한 김구가 입원한 상아의원 병실에서 가슴의 총탄 자국 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