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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연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인천상업학교 재학중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한국인 학생끼리 비밀리에 친목회를 조직하고 고락을 함께 하기로 결의하였다.이들은 일본인 교장 야마모도의 억압에 반대하면서, 학교에서 못하게 하는 졸업앨범을 제작하여 졸업 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기로 굳게 약속하였다. 그런데 이 학교 출신으로 일본 명치대에 진학한 송재필(宋在弼)이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다니는 친구를 방문하여 학병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처에 편지로 연락하다가 충북 영동서에 발각되었다. 이에 따라 친목회에 가입하였던 그를 비롯한 고윤희·김여수·김형설·정태윤 등의 동기생들이 1944년 1월부터 속속 영동서에 붙잡혔다. 이들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전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그는 1945년 3월 29일 일경의 모진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대전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기수는 1924년 3월 전북 금산군(錦山郡, 현재 충남 금산) 서산(瑞山)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현 사회제도의 개혁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인 고려공산청년회, 전북 금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사회주의대의』·『프롤레타리아사회학』·『경제학』·『무산청년독본』 등의 사상서를 구독 연구하는 등 사회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5년 10월 30일 조기수는 ‘전북청년연합토론대회’ 대표간담회에 참석하여 전북청년연맹(全北靑年聯盟)을 창립하고 조직부 책임을 맡았다. 이 연맹은 1927년 10월 30일 조선청년총동맹 전북연맹으로 변경되었다.1926년 12월 하순경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고 고려공산청년회 전북지역 여산(礪山) 조직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4월 15일 금산청년동맹 회관에서 열린 금산청년동맹(錦山靑年同盟) 제1회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1928년 8월 24일 제3차 조선공산당 전남북지부 관련자로 경기도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조기수는 1930년 12월 22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 500일 통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31년 8월 10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34년 5월 6일 공안을 방해한혐의로 금산경찰서에 검속되었다가 동년 5월 8일에 석방되었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